<산 시모음> 정연복의 '어머니 산(山)' 외 + 어머니 산(山) 하늘에 맞닿은 높은 봉우리와 깊숙이 내려앉은 계곡 드문드문 우람한 바위들과 아가 손 만한 작은 돌멩이들 훌쩍 키 큰 나무들과 앉은뱅이 이름 없는 풀들 숨가쁜 오르막길과 편안한 내리막길 전망이 탁 트인 능선과 푸른 잎새들의 그늘 속 오솔길 천둥과 번개와 벼락 벼락 맞아 쓰러진 고목들 산은 너른 품으로 말없이 이 모든 것을 포옹한다 오! 어머니 산(山) (정연복·시인, 1957-) + 산과 강은 산을 돌아 흐르는 강과 강에 제 모습을 비추는 산 항상 변함없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오랜 세월 흐르고 또 흘러 왔지만 강은 한 번도 같은 물을 담아 본 적 없었고 늘 말없이 그 강을 지켜봤던 산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새 움을 틔워 왔었지 산과 강은 변함없는 게 아니야 부지런히 제 할 일 다 하고 있었던 거야. (한현정·시인) +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산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 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과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이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김광섭·시인, 1906-1977) +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시인, 1966-) + 여름산 여름산은 내 어릴 적 바라본 젊었던 아버지. 푸르고 힘찬 육체가 능선을 이루며 누워, 편안히 휴식하고 있다. 내가 곁에서 웃고 울고 소리질러도 부딪치며 기어올라도 그저 귀여운 듯, 미소지으며 가만히 바라보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나는 어린 짐승처럼 한낱 여리디여린 생명체일 뿐이었다. 지금 짙푸른 여름산엔 야생의 산짐승과 날것들이 푸드득거리고 녹음을 먹은 깊은 계곡에선 물소리가 한창이지만, 젊은 아버지 같은 여름산은 능선이 구비치듯 크고 건장한 육체로 누워 산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몸짓들엔 꿈쩍도 않는다. 그저 한두 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할 뿐이다. (이수익·시인, 1942-) +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오늘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먼저 산에서 ㄴ을 빼고 ㅏㅏㅏㅏ 목놓아 바깥으로 아를 풀어놓으면 산은 마침내 ㅅ만 남게 된다 두 사람 비스듬히 몸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움직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걸어간다 ㅅ......ㅅ......ㅅ......ㅅ...... 산을 움직이는 두 사람 ㅅ......ㅅ......ㅅ......ㅅ...... 사랑하는 두 사람이다 (김승희·시인, 195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