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도토리들
가랑잎 속에 묻힌 산기슭
가시덤불 밑에서
달래야,
새파란 달래야, 돋아나거라.
종달새야, 하늘 높이
솟아올라라!
잊었던 노래를 들려 다오.
아른아른 흐르는
여울물 가에서
버들피리를 불게 해다오.
쑥을 캐게 해다오.
개나리꽃 물고 오는
노랑 병아리
새로 받은 교과서의
아, 그 책 냄새 같은
봄아, 오너라.
봄아, 오너라.
(이오덕·소설가, 1925-2003)
+ 봄눈
나 오늘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봄바람에 살살 녹아나는
저 봄눈 앞에,
(정세훈·시인, 1955-)
+ 경칩 부근
견디기 어려워, 드디어
겨울이 봄을 토해 낸다
흙에서, 가지에서, 하늘에서,
색이 톡 톡 터진다
여드름처럼
(조병화·시인, 1921-2003)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다시 오는 봄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도종환·시인, 1954-)
+ 봄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어떻게 알고
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
물에 꽃봉오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
아가씨 창인 줄은
또 어떻게 알고
고양이는 울타리에서 저렇게 올까
(김광섭·시인, 1905-1977)
+ 봄 풍경
싹 틀라나
몸 근질근질한 나뭇가지 위로
참새들 자르르 내려앉는다
가려운 곳을 찾지 못해
새들이 무작위로 혀로 핥거나 꾹꾹 눌러 주는데
가지들 시원한지 몸 부르르 떤다
다시 한 패거리 새 떼들
소복이 앉아 엥엥거리며
남은 가려운 곳 입질 끝내고는
후드득 날아오른다
만개한 꽃 본다
(신달자·시인, 1943-)
+ 난 지금 입덧 중 - 입춘
하얀 겨울,
치마끈 풀어내고 살그머니
가슴에 작은 꽃씨 하나 품었다.
설 넘긴 해가 슬금슬금 담을 넘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토해도 토해도 앙금으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매운 바람 속에 꼼지락거리던
꽃눈 하나 눈 비비고 있다.
(목필균·시인)
+ 봄
멀리서 우리들의 봄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아프게 아프게 온다고 했으니
먼 산을 바라보며 참을 일이다.
가슴에 단단한 보석 하나 키우면서
이슬 맺힌 눈으로 빛날 일이다.
(최종진·신부 시인)
+ 벗에게 부탁함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정호승·시인, 1950-)
+ 봄이 오는 쪽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차가운 얼음장 밑
실핏줄처럼 가느란 물소리
따사로운 소리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
귀기울일수록 힘세어지는 소리
알아듣는 가슴속에서
저 겨울산의 무거운 침묵 속
벼랑과 벼랑 사이
숨었다 피어나리
저 겨울벌판의 얼어붙은 땅 위에
납작 엎드렸다 피어나리
피어나 노래하리
은방울꽃, 애기나리, 노랑무늬붓꽃,
회리바람꽃, 지느러미 엉겅퀴,
땅비싸리, 반디지치, 숲바람꽃,
그리고 베고니아 베고니아
울어울어 마음에 가슴에
푸른 멍 붉은 멍들었을지라도
눈앞 코앞 하루 앞이 우울할지라도
계절이야 끊임없이 갈마드는 것
흥함도 쇠함도 갈마드는 것
이 모두도 지나가리니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을 버리지 않는 마음속에서
외따로 멀리도 바라다보는 눈雪길 속에서
(홍수희·시인)
+ 사기꾼 이야기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
언제나 추운 앞마당 내다보며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
다음날 나는 다시 속삭였네
내일 아침엔 정말로 봄이 오고야 말 거라고
저 아득히 눈보라치는 언덕을 넘어서
흩어진 머리 위에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푸른 채찍 휘날리며 달려올 거라고
귓바퀴 속으로 이미
봄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오지 않느냐고
앞마당에선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허공에 흰 머리카락 반짝이며 아내는 늙어가고
까르르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아무 소문도 없이 어른이 되고
종착역 알리는 저녁 열차의 신호음 들으며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도
일그러진 담장 밑에 백일홍 꽃씨를 심고
대문 밖 가리키며
보아라, 저어기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지 않느냐고
바람난 처녀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달려오지 않느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사기를 친다
내 생애 마지막 예언처럼.
(정성수·시인, 1945-)
+ 행복을 향해 가는 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간격
봄이 오고 있다
겨울에서 이곳까지 굳이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걷다보면 다섯 정거장쯤
늘 겨울 곁에 있는 봄
그 간격이 좋다
친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꽃과 잎사귀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슬픔과 기쁨 사이
가끔은 눈물과 손수건만큼의
그 간격이 좋다
허공을 채우고 있는
겨울, 나무와 나무 사이
외로움과 외로움 사이에 떠 있는
간이역
기차표와 역정다방의 여유
그만큼의 간격이 좋다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과
오는 봄을 내버려두고
그대와 나 사이
그 간격 속에 빠져버리고 싶다
(정용화·시인, 충북 충주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