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눈은 검고 커다랗다
싸우니까 더 커다랗다
와- 와- 떠드는 사람들 소리에 뿔을 맞대고 있지만
소의 두 눈은 점점 더 커다랗게 껌뻑, 껌뻑, 슬프다 서로
미안, 미안하다고 한다
(문인수·시인, 1945-)
+ 황소
바보 미련둥이라 흉보는 것을
꿀꺽 참고 음메! 우는 것은
지나치게 성미가 착한 탓이란다
삼킨 콩깍지를 되넘겨 씹고
음메 울며 슬픔을 삭이는 것은
두 개의 억센 뿔이 없는 탓은 아니란다
(윤곤강·시인, 1911-1950)
+ 내일로 가는 소
산 넘어 가시덤불
어둠 밟고 가는 힘을 보아라
지치고 외로운 길 가며
먹은 것 꺼내 씹는 분노를 보아라
자라는 뿔을 보아라
굽을 보아라.
썩은 말뚝에 몸 부벼 대는
내 고삐의 사랑을 보아라.
이 나라 콩 깍지 개밥풀 누르고 설운 꽃 먹고
밥이 되는 커다란 똥을 보아라
산 넘어 가시덤불
어둠 밟고 가는 힘을 보아라.
(이상국·시인, 1946-)
+ 황소
잡혀가는 신셉니다
끌려가는 몸입니다
빠르게 내달리는 고속도로
짐차의 뒷칸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네 다리 앙바투어 서서
몸 바치러 가는 신셉니다
전쟁터에서 사로잡혀
적군에 끌려가는 병사처럼
이웃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눈 인사 한번 건네지 못하고
억울하게 떠나는 길입니다
사람들의 포로가 되어
땀과 눈물을 바치고
죽도록 일만 하다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살과 뼈와 피를 바치러 가는
한 마리 황솝니다.
(나태주·시인, 1945-)
+ 황소
황소에게는
우람한 몸과
힘이 센 뿔과
강건한 뒷다리와
그리고
성이 나면
무섭게 부라릴 줄 아는 눈과
그 무엇보다도
힘을 아무 곳에나 함부로 쓰지 않는
유순한 마음이 있다.
덩칫값을 하느라
웬만한 힘든 일에는
성내는 법이 없다.
해서,
일을 당하기가 일쑤다.
힘이란 덩치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덩치란 것도
때를 맞추어
적절히 먹기도 해야
지탱해가는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우매한 채찍은
일만을 재촉해온다.
배고픈 데엔 장사가 없어
배고프면
일단 눈이 뒤집히는 것이고
눈이 뒤집히다 보면
보이는 게 없고
보이는 게 없다 보면
도살을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인심이길 거부한
채찍을
몸으로 밀어버리고
뿔로 받아버리고
뒷다리로 걷어차버리고
눈을 부라리고 마는 것이
이 나라 토종 황소다.
(정세훈·시인, 1955-)
+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김기택·시인, 1957-)
+ 워낭소리 - 희생의 소
이기적인 세상에서
사람보다 나은 소 한 마리 봅니다
인연 맺은 주인을 위해
무거운 나뭇짐 지고 살다
죽음 길 떠나기 전
마지막 땔감 준비 의무를 다한 후
진정한 사랑 화답하고 갑니다
사랑이란 희생입니다
혹 인연 줄 끊는 법정의 망치 앞에서도
나뭇짐 때문에 다투지 아니하고
자신의 안락 찾아 도피하지 아니하고
만남보다 이별의 순간
더욱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소는 사람에게 깨우쳐줍니다
사랑이란 불변입니다
삶의 목에 걸린 언약의 워낭
바람 불어도
비가 내려도
길가에 핀 꽃들 외면한 채
딸랑 딸랑, 불변의 소리내기를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입니다
(손희락·문학 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소와 함께
며칠 동안 건넛마을 객토 품 파느라고 너를 돌보지 못했다
바람도 불던 바람이 내 피붙이 같아서 덜 춥고
여물도 주던 사람이 주어야 네가 편하지
내가 말린 꼴 수북히 주고 더운 뜨물 퍼주니
너는 더없이 흡족해서 꼬리깨나 휘두르는구나
이랴 띨띨 밥 먹은 뒤 바깥 말뚝에 매어 두니
소가 웃는다더니 바로 네가 좋아하는 것 알겠다
외양간 쳐내어 쇠똥무더기 검불에 섞었다
네 집 뒤쪽은 샛바람 막게 두툼두툼 떼적 치고
남쪽으로는 비닐창 달아내어 볕조각 들게 했다
따뜻한 날이라 송아지 두 놈 까불대며 다니며
무우말랭이 널어 둔 멍석 밟고 마구 논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잠자리 깨끗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 동안 네 엉덩이 누룽지깨나 덕지덕지로구나
마른 똥 긁어 떼어내니 이놈 봐라 곧게 서 있다
송아지 두 놈 논 쪽으로 먼저 나간 김에
에따 너도 나도 개천 둔덕으로 놀러 나가자
외양간에만 죽치고 서서 새김질 거듭하다가
이렇게 마음 탁 터놓고 나오니 너 좋고 나도 좋다
바람에 한 번 멋지게 감긴다 무슨 회오리바람이냐
나와 너 단짝 동무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뜬다
얼씨구 양지쪽으로 조금씩 돋은 풀도 반갑다
이런 풀은 뜯지 말아라 네 새끼 송아지들 장난질한다
나도 너도 흐뭇한 것 하나도 하나가 아니다
햇볕 실컷 쪼여라 바람 쏘여라 바깥도 집안 아니냐
내 너를 두고 말한다 소만한 덕 어디 있느냐
견디기로는 사람 중에 백범이다 못 견디기로는 임꺽정이다
가자 오랜만에 나온 바깥 기쁨 몽땅 가지고 돌아가자
(고은·시인, 1933-)
+ 우보예찬
소걸음은 우아하다 그 육중한 몸의 균형을 결코 잃지 않으면서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옮겨 놓는다
마치 장고 끝에 중대사를 결재하듯 땅에 도장을 찍듯 발을 옮긴다
느릿하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우직하지만 실족(失足)이 없는 게 '우보의 미학'이다
소가 실족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송호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