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관한 시 모음> 하청호의 '그늘' 외 + 그늘 나는 커다란 그늘이 되고 싶다. 여름날 더위에 지친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여린 풀과, 어린 개미, 풀무치, 여치,...... 그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작아 조그만 그늘만 드리우고 있다. 언젠가 나는 크고 튼튼하게 자라 이 세상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을 내 그늘 속에 품어 주고 싶다. 햇빛이 강하고 뜨거울수록 더욱 두터운 그늘이 되어 그들을 품어 주고 싶다. (하청호·시인, 1943-) + 그늘이라는 말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 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에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허형만·시인, 1945-) + 그늘 그늘이 없는 얼굴은 바라볼 때마다 섬뜩하다 제대로 목놓아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듯 그늘 없이 어찌 한세상을 잘 살다 갔다 할 수 있으랴 한 무더기의 화초가 메마른 흙의 마음을 울리듯이 그늘은 깊어질수록 새록새록 상처를 키워간다 누구도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아픔으로 짙어지는 그늘의 배경에서 죽도록 사무치는 상처 하나 키워갔으면 싶다 (양인숙·시인) + 석류나무 그늘에서 행여 내 마음속에도 소 물 먹이는 마음과 공금횡령하는 마음과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고 거짓말하는 마음과 나만 배부르고 편하면 그만이다 싶은 무사안일의 편협함과 남보다 좀 높이 되어 거들먹거려 보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숨어 있나 없나 가끔은 눈여겨볼 일이로다. 눈여겨볼 일이로다. 석류나무 그늘에 와서 잠시나마 깨끗하고 붉은 그 석류꽃의 빛깔이기를 나는 마음해 보며 그리하여 드디어 하늘 나라의 촛불인 양 타오르는 석류꽃 앞에서 부끄러워할 일이로다. 부끄러워할 일이로다. (나태주 시인, 1945-) +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 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이정록·시인, 1964-) + 그늘 초가을 땡볕은 땅벌처럼 따깝다 친구 만나러 가는 길 부채로 이마를 가리고 징검징검 그늘을 골라 딛는다 가로수 그늘에 들기도 하고 담벼락 그늘에 젖기도 하고 다세대 건물의 그늘도 반갑다 그늘들을 찾아 밟고 가다 문득 그늘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늘에 빚진 것이 아니지… 평소에 별로 고맙게 여기지 않던 저 가로수며 담장이며 집들이 내게 그늘의 보시를 베푼 게 아닌가? 그늘, 그늘… 돌이켜 보니, 지금껏 나는 한평생 그늘에 빚만 지고 산다 부모의 그늘, 스승의 그늘 아내의 그늘, 친구의 그늘 농부며, 어부며 수많은 이웃들의 그늘 어느 시인은 자신을 기른 것은 8할이 바람이라 했지만 나를 기른 것은 볕이 아니라 9할이 그늘이다. (임보·시인, 1940-) + 나를 나는 늘 그늘처럼 온전하지 못한 발목뼈에 지탱하고 덜거덕 덜거덕거리며 하루를 끌려 다니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나는 늘 말도 없이 미안해합니다 미래를 위한 비밀스런 투자를 하거나 잘못된 시대를 바라보면서도 투쟁하는 일도 하나 없는 나를 나는 늘 그늘처럼 가까이 따라다니기만 합니다 (채상근·시인, 1962-) + 아름다운 그늘 봄부터 가을까지 방 안에서 안 나간 적이 있었다 창 밖만 바라보고 지냈다 창 밖엔 좁은 마당이 있었고 목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봄부터 그는 꽃을 틔우고 차츰 이파리도 피워 갔지만 내가 바라본 것은 꽃잎도 잎사귀도 아니었다 다만 난 꽃의 그늘과 잎사귀의 그늘만을 보았다 어떤 그늘도 그늘은 단지 그늘이었다 목련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제 그늘을 묵묵히 키워가고 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앙상하게 아름다운 그늘을 내게 보여주었다 제 몫의 그늘을 그리고 또 지우며 나무는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배정원·시인) +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나무그늘 나무그늘에 앉아 쉬어본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뛰놀던 나무그늘 햇빛이 가리고 잠시 눈을 감으면 멀리서 들려오는 친구들과 놀던 소리 다시 눈을 떠보면 주위에 아무 사람도 찾을 수 없고 어쩌다 수십 년 지나도록 이 나무만 남았는지 나무에게 물어보면 그저 이파리만 하늘하늘 팔랑거리고 이제 이 나무만 없어지면 어린 시절 추억도 사라지는 것인가 삶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나무는 그냥 쉬어가라며 언제라도 외로우면 나를 찾아오라며 아무 대답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 (박재동·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