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시모음> 헤르만 헤세의 '저녁에 집들은' 외 + 저녁에 집들은 저물녘의 기운 황금빛 속에 집의 무리는 조용히 달아오른다, 진기하고 짙은 빛깔로 그 휴식은 기도처럼 한창이다. 한 집이 다른 집에 가까이 기대어, 집들은 경사지에서 의형제를 맺고 자란다,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노래처럼 소박한 그리움으로. 벽, 석회질, 비스듬한 지붕, 가난과 긍지, 쇠퇴와 행복, 집들은 부드럽고 깊게 그 날에 그 날의 열기를 반사한다. (헤르만 헤세, 1877-1962) + 까치집 가지 끝에 매달린 둥지 하나가 모든 절망을 무색케 한다. 삶이란 저렇게 헐벗고도 살아남는 것. 고압선 전신주로 아스라한 첨탑으로 오늘 갈 곳 없는 영혼이 기어오른다. (이현우·시인) + 집에 살기 지칠수록 삶은 집에 사는 것 집과 더불어 사는 것 조금씩 모자라지만 집은 애틋이 끌어안는 순한 활력의 둥지 요람이요 보금자리 육체이며 영혼 하나의 우주 집을 짓는 것은 세월의 흔들림 속에서 선명한 경험이요 기억 세월이 없으면 집이 없고 집 없이는 삶도 없네 집 없는 사람은 외톨이요 방랑자 떠도는 유목민의 눈망울로 슬픈 그리움이 흐르네 (은복 김현옥·시인) + 내 집이 천국이다 근 한 달여를 밖으로 나가 말도 통하지 않는 다른 세 나라에서 끼니때면 김치도 없는 밥을 먹고 날이면 날마다 일정 맞추느라 모닝콜 소리에 잠도 맘대로 못 자고서 이곳저곳 졸린 눈 비벼가며 돌아다니다가 어젯밤 집에 와 푹 잤더니만 이토록 평안함 있으랴 아 여기 내 집이 천국일세 천국 (김길남·시인) +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외갓집 잔상·2 나는 외가에서 농촌을 알았다 새벽 똥장군을 지고 밭에 가서 거름 주고 쇠죽 쑤고, 나무하고, 뽕 따고, 꼴 베고, 논밭 매고. 농촌의 바쁜 손길도 알았다 겨울이면 변소 가기 무섭다고 방문 열면 놓여있는 오줌통 하나 그곳에다 일을 보고 그래도 무서워 솜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추운 겨울 청솔가지 연기 가득한 외갓집 사랑방 화로에서는 군고구마 익어가고 짓이긴 고욤 단지 속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지금은 모두 떠난 그곳이지만 외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할머니 하고 달려가고 싶은 외갓집이다 (노태웅·시인) + 낡은 집 걷다가 폐가(廢家)를 만나면, 문득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마을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집일수록, 나는 그 집이 왜 홀로 서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무너진 돌담 위로 달빛 내리고 그 달빛이 슬며시 문풍지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나도 몰래 따라 들어가 그 집의 속살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이제는 잊혀진 체온 벌레 울음소리에 포위되어 무너진 영혼처럼 서 있는 집을 보면 나도 한 번 무너져 보고 싶어진다 속에 깊고 그윽한 어둠을 감추고 내 살을 파먹는 구더기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싶어진다 그러면 비로소, 집 한 채가 완성되리라 쓸모 없어 버려진 집처럼 벤치에 놓여 있는 노인을 보면 불현듯,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강수·시인, 1968-) + 폐가 어머니를 낳고 외할머니 유언을 낳고 술주정뱅이 사위가장 정신 번쩍 들게 한 내 울음도 낳고 또래이모가 좋아했던 꽃, 구절초를 낳고 아 패륜을 모르는 열일곱 겁 없는 짝사랑을 낳고 이윽고는 허물어져 빈터로 돌아가려 곳곳에 금이 패는 집이여 이제는 내 가계의 희로애락이 너를 떠나 무엇이 되려고 사칸접집 흙벽을 쪼나 줄탁의 흔적 선연한 옛집이여 (원무현·시인, 1963-) + 한 채 집이 되고 싶다 이제는 나도 한 채 집이 되고 싶다 까치 떼 날아드는 철든 대숲에 머리카락 쓰다듬는 구름 아래 섰고 싶다 굴뚝이 나지막한 집 흙 이겨 바른 옴팍한 구들에서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끄느름하게 풀무질로 솟는 맵겨처럼 타고 싶다 추억의 저녁 안개 낮게 흐르고 아이들이 어미 품에 고물처럼 묻어갈 때 나는 너무 건방지게 쇠어버렸구나 우리 동네 공회당 북소리에 맞춰 한 발 두 발 아이처럼 걸어가고 싶다 (이향아·시인, 1938-) + 높은 집 그 집, 절벽 위에 피어 있던 집 한강이 마당이던 집 비닐 창 새어나오는 불빛 강바람에 펄럭이고, 루핑 지붕에 파란 별 오래 머물다 가던 집, 평상에 온갖 일감 수북하여 고물 라디오 밤늦도록 목이 쉬던 집, 고샅길 쫓아 낡은 짐자전거 올라오면 수박 한 덩이로 가득 차던 집 가끔씩 개 끄스르는 연기 찾아들면 허기진 해바라기 흔들흔들 집 울타리 서성이던 집, 머리맡에 빗소리 찰박찰박 떨어져 꿈의 천장이 젖어 갈 때, 한강 거슬러온 배 한 척 따라 밤의 저편으로 끝없이 흘러가던 집 햄머질 서너 방에 무릎 꺾이던 집, 무명 보자기 몇 개로 싸이던 집, 소형트럭에 실려 낯선 길 털썩털썩 가던 집, 지금도 가끔씩 하루의 가파른 곳에 피어나, 남몰래 들어가 그 평상에 앉아보는 기억의 금호동, 높고 높은, 그 벼랑의 집 (최을원·시인, 경북 예천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