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시모음> 이성선의 '하늘 악기' 외 + 하늘 악기 높은 하늘 중턱을 길게 이어져 떠가는 태백산맥 줄기 흐르는 강 하늘에 매놓은 악기줄 신이 저녁마다 돌아와 연주한다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저 높은 길에 내 발이 올라선다 내가 하늘 악기 위를 걸으며 그분 시간을 연주하는 날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함구(緘口) 오래 산에 다니다 보니 높이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높은 데 오르다 보니 나는 자꾸 낮은 데만 들여다보고 내가 더 낮게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매사를 깊고 넓게 생각하며 낮은 데로만 흐르는 물처럼 맑게 살아라 하고 산이 가르쳤습니다 비바람 눈보라를 산에서 만나면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내 버릇이었는데 어느 사이 그것들을 피해 내려오거나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올라갈 때가 많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데가 더 잘 보이고 내가 더 고요해진다는 것을 갈수록 알겠습니다나 나도 한 마리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입을 다물어 나의 고요함도 산에 보탭니다 (이성부·시인, 1942-2012)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사무치는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가는 소리 들어봅니다 세월의 찌꺼기 이내 바람에 부서집니다 바람소리에 폭우처럼 떨어지고 내 마음에도 부서져 폭우처럼 비웁니다 산을 둘러앉은 한줄기 내일의 그리움을 밟고 한줄기 그리움으로 산을 오릅니다 구름처럼 떠서 가는 세월 속에 나도 어느새 구름이 됩니다 소리 없이 불러 보는 내 마음의 내일 적적한 산의 품에 담겨 내 생각은 어느새 산이 됩니다 산을 오르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꿈을 꿉니다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산의 그리움을 배웁니다 (강진규·시인, 서울 출생) + 산을 오르는 당신 가슴 아픈 사랑의 열병 침묵으로 앓은 후 그대는 산을 올랐노라 했습니다 능선도 흐느끼는 길 따라 추억은 계곡에 버리고 미련은 소나무 가지에 걸어 이름 모를 산새 먹이로 주었노라 했습니다 모기의 흡혈 두려워 산을 멀리하던 그대의 변화 사랑의 아픔이 깊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대가 다녀간 높고 낮은 산 꺾어진 가지마다 걸어놓은 미련 아직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은 산새들도 안타까워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희락·문학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산울림 산에 올라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훔친다. 먼 산을 바라보며 나를 보낸다. ~~ 그 소리에 마음을 담아 멀리멀리 보낸다. 나를 떠난 소리는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 듯 산을 울려 다시 돌아온다. 산에 오를 때마다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 풀, 나무, 돌, 바람, 새, 벌레, 햇빛, 구름,... 언제나 변치 않고 푸르름을 내뿜는 네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구나. (허정虛靜·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비바람만 불어도 서로서로 어깨를 다독여 주는 나무를 본다 산에 가면 뇌성벽력 요란해도 같이 비를 맞아 주는 바위의 묵묵함을 본다 철 따라 단장하는 산의 순한 세상은 천 년을 살고도 만 년을 늙지 않는 모습을 본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가뻐 치부 속 깊은 숨 몰아쉴 때 우린 마음을 털어 산 속에서 만나는 이름 모르는 이들 덥석 손잡아 주진 못해도 반가운 인사로 복 지으며 천연스런 산이 되자 산에 가면 산에 가면 (혜유 이병석·시인) + 산 위에서 산 위에서 보면 바다는 들판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새싹처럼 솟아오르고 싶은 고기들의 설렘을. 산 위에서 보면 들판은 바다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고기비늘처럼 번득이고 싶은 새싹들의 설렘을. 산 위에 서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짐승 그러나 너는 알 거야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은 내 마음의 설렘을. (김원기·아동문학가, 1937-1988). + 등산·4 등산하는 목적을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하는 재미를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얻은 걸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남은 걸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다네. (김원식·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 내려다보는 산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눈빛,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모든 것의 등뒤를 비추는 그 서늘한 눈빛 때문이다 나의 이 장난 같은 일상 가운데 엄습해오는 그 눈빛 모든 것의 등뒤에 와 퍼부어대는 소나기 같은 눈빛 때문이다 내가 산에 저 험한 산에 오르는 까닭은 내려다보는 산은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무산·노동운동가 시인, 1955-) + 도봉산 굽이굽이 길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 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정연복·시인, 1957-) +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 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한비야·오지 여행가,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