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시모음> 임보의 '말의 빛깔' 외 + 말의 빛깔 사람의 말씨에도 때깔이 있다 아니, 지방마다 빛깔이 다르다 중앙인 경기는 매끈한 황색 남쪽의 호남은 따끈한 적색 중간의 호서는 미지근한 분홍 영남은 단단한 청색 관동은 담담한 녹색 관북은 차가운 백색 관서는 무거운 흑색 해서는 메마른 갈색 나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터잡아 살면서 청주의 직장에 오르내리다 보니 내 말의 빛깔은 누르딩딩 본적을 잃은 숭늉 빛이다 (임보·시인, 1940-) + 여보! 비가 와요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신달자·시인, 1943-) +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너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어 전화했더니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은 너에게서 전화 받은 날 나도 지금은 바쁘다고 했다 지나고 보면 왜 그리 바쁜 날이 많았는지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왼손에게는 늘 오른손이 바쁘다고 했다 오른손에게는 늘 왼손이 바쁘다고만 했다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거나 너의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스스로 그렇게 바쁘다, 바쁘다, 되도록 이면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홍수희·시인) + 말하지 않은 말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유안진·시인, 1941-) + 인간의 말에는 모여서 피는 꽃들 더불어 자라는 나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삽니다. 비가 오면 비 이야기 바람 불면 바람 이야기 날이 새면 오늘 이야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그게 궁금해서 그들의 말을 엿듣다가 그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을지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 든 거예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인간이 주고받는 말에는 (물론 진실도 담겨 있지만) 거짓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김형영·시인, 1945-) + 그 한마디 말 중학생 아들에게 용돈 줄 때마다 봉투에 넣어주는 쪽지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그 옛날 외양간 소똥 치우던 손으로 내 종아리 매질했던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문 막걸리 냄새나던 당신의 모국어 세상과 맞서게 만든 금쪽같은 말 문득 새벽잠 깨면 콧등이 시큰해지는 말 언젠가 내 아들의 등 뒤에서 힘이 될 그 한마디 말 출근길 양복 주머니에 든 고교생 딸의 쪽지 "아빠, 사랑해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응원 지갑 속 복권보다 더 힘나는 말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듯 농사꾼 내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말 입가에 맴돌기만 했던 말 후회는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것 아, 미루고 미루다 억울하게 하지 못한 그 한마디 말 늦은 밤 현관 밖을 들락거리던 아내 중학생 아들에게 현관문 열어주며 내색 않고 던지는 첫마디 "밥은 먹었니?" 이슥한 밤 아버지 몰래 대문 따주시던 내 어머니 생전에 하시던 말 시외 전화할 때마다 꺼내시던 첫마디 김치찌개 냄새나던 당신의 모국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녹아 있던 아랫목 이불 밑 밥그릇 같은 그 한마디 말 (김장호·시인) + 어느 말 한마디가 어느 날 내가 네게 주고 싶던 속 깊은 말 한마디가 비로소 하나의 소리로 날아갔을 제 그 말은 불쌍하게도 부러진 날개를 달고 되돌아왔다 네 가슴속에 뿌리를 내려야 했을 나의 말 한마디는 돌부리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 피 묻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상처받은 그 말을 하얀 붕대로 싸매 주어도 이제는 미아처럼 보채는 그를 달랠 길이 없구나 쫓기는 시간에 취해 가려진 귀를 조금 더 열어 주었다면 네 얼어붙은 가슴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니 말 한마디에 이내 금이 가는 우정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겠니 지금은 너를 원망해도 시원찮은 마음으로 또 무슨 말을 하겠니 네게 실연당한 나의 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너를 찾을 때까지 나는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네가 나를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참 긴 말 일손을 놓고 해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 엄마 언제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 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같이 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 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지며 듣는 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 살 붉은 손이 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 잘 있냐? 병 앓고 잃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피는 꽃처럼 소리 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저녁 밥상 앞 자꾸 자꾸 자라고 있는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는 엄마 언제와?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참 긴 이 말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씻어내는 빨랫감처럼 손이 곱는 말이리 참 아린 말이리 (강미정·시인, 1962-) + 말빚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는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謝過와 謝罪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이희중·시인, 196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