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시 모음> 한용운의 '지는 해' 외 + 지는 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 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한용운·시인, 1879-1944) + 노을 산 밑 교회당 + 에 노을이 내렸다. 어미새가 + 에 앉아 저녁 기도 드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노을 속에 아늑하다. (김영일·아동문학가) + 노을 봄이 오는 산개울에 두런거리는 소리 오늘은 또 누가 다비茶毘를 하는가 서쪽 하늘엔 슬픔마저 타는 저 찬란한 빛 저녁노을. (하청호·시인, 1943-) + 노을 보아주는 이 없어서 더욱 아리따운 아낙이여. (나태주·시인, 1945-) +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저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최영철·시인, 1956-) + 남은 빛 모두 거두어 어느 저녁 바다에 내 남은 빛 모두 거두어 붉게 빠져들고 싶다 황홀한 노을 잠깐이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품에서 잔잔하게 저물고 싶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 노을 어디서부터 울려 퍼졌나 꿈결처럼 아련한 노랫소리 영원인 듯 먼 지평선 아래로 잦아드는 화음 마지막 발자국 지우며 사막 끝으로 장엄히 사라져간 부족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랫소리 (조향미·시인, 1961-) + 황혼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조옥동·시인, 충남 부여 출생) + 선문답禪問答 뜨거운 물음이네 서녘 하늘 붉은 것은 활활 태워 버리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산너머 머나먼 여행 떠날 준비 됐느냐는. 말없는 대답이네 산 그림자 짙은 것은 듣지 않는 아우성 속으로만 삼키려니 두 팔을 가지런히 하고 나를 따라 하라는. 그대도 모를 거고 나 또한 알 수 없네 한 생을 건너가면 모든 의문 풀리는지 하늘도 산도 아니면 바다는 알고 있는지. (구금자·시인) + 어느 해거름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진이정·시인, 1959-1993) + 저녁 노을 어두워지며 썩은 강에 검은 산이 소리 없이 조선 망하듯 누울 때 앞논에 개구리야 뒷산에 소쩍새야 빚진 빚진 나라 울지 마라 한 사십 년 가문 사랑 탓하지 마라 오늘 저녁 부끄러움에 멍든 가슴들이 저렇게 다란히 피워 올리는 너무 찌들려서 아름다운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보아라 밥 먹고 어디 머리 둘 곳 없을지언정 끝없이 살아 우리 현대사 내려다보는 노을 아래 우리가 씨 뿌린 곡식같이 당당하게 살아 이 땅을 잠들지 않게 하는 내 아버지 붉은 얼굴과 더불어 살아 (안도현·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