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묵상 시모음> 이규홍의 '아버지의 임기' 외 + 아버지의 임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에 하느님의 속도 까맣게 탓을 것이다. 아버지의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 (이규홍·시인, 1966-) + 어느 날 뒤뜰엔 함박눈 같은 목련 길가엔 싸라기 같은 벚꽃 세상 아름답다고 사랑하며 살라고 두 팔 마음껏 벌리시는 이가 있으니 (한희철·목사 시인) + 9월 소국(小菊)을 안고 집으로 오네 꽃잎마다 숨어 있는 가을, 샛노란 그 입술에 얼굴 묻으면 담쟁이덩굴 옆에 서 계시던 하느님 그분의 옷자락도 보일 듯 하네 (홍수희·시인) +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가라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시인, 1922-2004) + 하나님 놀다 가세요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신현정·시인, 1948-2009) + 하느님과 건달 세상물정 모르는 천사를 건달이 건드렸다 건달이 할 줄 아는 것은 천사를 꼬셔먹는 일 천사가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시키는 일 천사는 애 낳고 밥 짓고 빨래하고 평생 농사지으며 살았다 아무래도 빈둥거리며 노는 건달과 하느님은 한통속인 듯 했다 (이덕규·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 마당 - 송광사에서 여기도 하느님 마을 한 귀퉁이 흙마당에 봄비가 다녀가고 있다 몇 개 발자국들도 다녀갔다, 누구의 것일까 하느님은 발자국 깊이를 보고도 이 세상 마당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안다 마당을 나서는 우리 일행을 보고 너희들이구나 하며 후박나무 옷섶의 빗방울을 내려 어깨를 툭툭 쳤다 하느님이 오늘 보신 내 발자국은 어떨까. (박두순·시인, 경북 봉화 출생) + 잠의 집 나는 때때로 걸어다니는 잠의 집이다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꿈을 데려올 수 있는 고요한 잠의 노래이다 눕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는 내 몸의 신비를 나는 감사하고 감사하며 잠 속의 하느님을 만난다 잠 속에서 그분을 새롭게 믿고 포근하게 사랑한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오탁번·시인, 1943-) +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 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공광규·시인, 1960-) + 하느님도 창작을 하신다 언 땅을 밀고 복수초 피우시다가 진달래 개나리 연작(連作)을 하시더니 군데군데 벚나무 오디 열매를 행간에 숨겨 익게 하신다 소나기 황톳물 흐르는 산 속으로 천둥번개 돌아다니게 하신다 고라니 토끼는 운(韻)친 길로 돌고 버들치는 조사(助詞)로도 부족하지 않게 하신다 흰 구름 슬슬 높이 두시는가 싶더니 산머리부터 단풍들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생(生生)한 시(詩), 알밤도 여기저기에 툭툭 떨어트리신다 여름의 결구(結句)에다 가을을 펼쳐 산과 강이 한 몸으로 두 계절 즐길 때 때로 이른 첫 눈발 날리시어 서릿발이 산길을 서둘러 내려오게 하시고 해바라기, 고추, 벼, 고구마, 참깨...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땀방울이 배어 있어 그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먹고 마시고도 남는 하느님의 시(詩) 빈속에 가을 산등성이를 걸으면 물큰물큰 뼛속으로 채워지는 꽃과 나무 길짐승과 날짐승들의 노랫소리 대침(大針)처럼 골수를 찌른다 가슴도 찌르라고 구절초 한 송이에 엎어지면 구름 뒤에서 달려온 햇빛이 등짝을 그을려 주는 것 바람이 간간이 식혀 준다 (강태승·시인) + 하느님, 잠깐만 조카 녀석이 침팬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없이도 우쭐우쭐 춤을 추고 방 안 가득 들어서는 울창한 밀림. 침팬지는 하이얀 넝쿨꽃 그네를 타고. 녀석은 신이 나서 박수를 친다. 태엽이 다 풀렸는지 스르르 주저앉는 침팬지. 문득 밀림이 사라지고. 저만큼 벽에 부딪혀 파르르 떠는 손…… 하느님, 잠깐만! 나도 잘 주저앉는 놈이지만 다시 일어설 테니 제발 던지지 마세요. 아니, 정신차리도록 세차게 던져 주세요. (김해원·시인, 제주 출생) + 까막눈 하느님 해도 안 뜬 새벽부터 산비탈 밭에 나와 이슬 털며 깨단 묶는 회촌마을 강씨 영감, 성경 한 줄 못 읽는 까막눈이지만 주일이면 새 옷 갈아입고 경운기 몰고 시오리 밖 흥업공소에 미사 드리러 간다네 꾸벅꾸벅 졸다 깨다 미사 끝나면 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 하느님께 올린다네 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 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 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 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 모 심을 땐 참꽃 같고 추수할 땐 개좆 같은 세상에게도 한 잔.... 그러다가 투덜투덜 투덜대는 경운기 짐칸에 실려 돌아온다네 (전동균·시인, 1962-) + 하느님은 위험하시다 하느님은 고달프시다 도둑질을 한 사람 간음을 한 사람 살인을 한 사람 낱낱이 자기의 비밀을 불온한 재산처럼 간직한 채 당신의 이름을 헛되이 부를 때 하느님은 고달프시다 낱낱이 그 죄를 가리어 용서하고 위로하고 다시 사랑하시고 괴롭고 슬프고 또 외로우시다 기도소리와 성가소리에 기뻐하시기보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속마음까지 보시는 당신께서 저 사람들의 마음속의 원한과 증오와 욕심을 훤히 들여다보시며 하느님은 난감하시다 호시탐탐 당신을 처형하려는 무리 앞에 하느님은 또 위험하시다 (최일화·교사 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