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강은교·시인, 1945-)
+ 비
오랜 가뭄 끝에 듣는 즐거운 빗소리
소리에도 樂이 있어, 오동 넓은 잎에 푸른 웃음이
어린 새우 마냥 톡톡 튀며 달아난다
나이 마흔 가까워서야 귀는 바늘귀만큼씩 열리고
추녀의 모난 각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둥글게 풀어지는 和音 듣는다
그 和音에 말린 잎들 환하게 펴지는 소리
自然이 착한 혀를 또르르르 풀며
화답하는 소리
듣는다
(정일근·시인, 1958-)
+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이상희·시인, 1960-)
+ 비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군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천양희·시인, 1942-)
+ 비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雨愁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할까나.
(천상병·시인, 1930-1993)
+ 밤비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천 년을 흐르는 강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오세영·시인, 1942-)
+ 비 그치고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류시화·시인, 1958-)
+ 비 온 뒤 아침 햇살
나뭇잎 씻어줄래
투명하도록 푸르게 씻어줄래
푸른빛 타오르게 불태울래
벌들의 몸에도 붙어 반짝이며 날아갈래
죽은 나무에도 척 붙어 쓰다듬을래
바위에도 내려앉을래
거름더미에도 내려앉을래
눈부시게 만들래
노란 꽃처럼 한 송이 노란 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만들래
(유승도·시인, 1960-)
+ 신이 세상을 세탁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지난밤에 나는
하늘에서 부드러운 비를 내려
신이 이 세상을 세탁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아침이 왔을 때
신이 이 세상을 햇볕에 내걸어
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풀줄기 하나
모든 떨고 있는 나무들을 씻어 놓으셨다
산에도 비를 뿌리고
물결 이는 바다에도 비질을 하셨다
지난밤에 나는 신이 이 세상을
세탁하고 있음을 보았다
아, 신이 저 늙은 자작나무의 깨끗한
밑동처럼 내 혼의 오점도 씻어 주지
않으시려는지....
(윌리엄 스티저·미국 목사)
+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하늘 한 조각
(나희덕·시인, 1966-)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비가(悲歌)
빗살무늬로
허공에 문양을 새기며
비가 내립니다
신석기시대에도
떠나가는 이
뒷모습이 희뿌옇게 보이도록
오늘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린 날 있었을 테지요
아,
그 시대에도
한 사람은 떠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망연히
내리는 비만 바라볼 수밖에 없어
마음속까지
온통 비스듬한
빗살무늬를 새겨 넣다가
끝내, 그대로 주저앉은 날 있었겠지요
(최원정·시인, 1958-)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시인, 1966-)
+ 아내의 봄비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
파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김해화·노동자 시인, 1957-)
+ 구름의 장례식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의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 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