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시 모음> 반칠환의 '가뭄' 외 +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반칠환·시인, 1964-) + 가뭄 아버지는 오늘도 하늘 가까운 들로 땅을 꿰매러 간다 갈라진 손으로 풀잎의 눈물을 받아 아사증 걸린 곡식들에게 멕인다 입이 없는 아스팔트 위에서 나의 갈증은 땅을 핥지 못하고 당신의 땅을 수화로 부른다 (윤수진·시인, 1964-) + 가뭄 논바닥은 찢어지고, 개울 바닥 혀 내밀고, 물 못 댄 삼촌 술만 먹고, 고양이 뱃가죽 달라붙고, 교실 쥐똥 늘어가고, 우리들 속 타들어 가고. (고지운·아동문학가) + 가뭄 우기 서릴 계절인데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바다에서 증발하는 숱한 수증기는 어디로 간 걸까 그들의 자취 가슴 시리게 찾아보려 해도 마냥 허허로운 하늘은 해맑은 얼굴로 슬쩍 바다를 굽어본다. (손정모·시인, 1955-) + 가뭄 나무들이 마지막 목안을 넘는 말 물 ~ 무~ ㄹ, 걸어가는 내 발목에 슬픔을 매달아 준다 탈수된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죽음의 사자가 눈앞에 보이는 듯 푸른 숨을 토막치고 있다 한 발짝도 자연을 앞설 수 없는 이것뿐인 세상의 능력인데... 나는 초혼처럼 가슴을 찍어내듯 혼자 말을 한다 뿌연 회색 황사 차일을 뚫고 깡마른 햇살이 늘어진 울타리 장미넝쿨의 장미꽃에 불침을 쏘아대고 있다. (유소례·시인, 전북 남원 출생) + 가뭄 강바닥은 허연 제 뱃속을 보이며 하늘을 향해 누워있다 한 마리의 물고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날 사행천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뜨거울수록 입은 타들어가고 물꼬싸움에 낫이 오갔다는 시퍼런 소문도 하룻만에 말라버렸다 개구리 잡아먹던 두루미들의 발자국이 일수도장 자국처럼 굳어 가는데 멀리 들리는 한낮의 뻐꾸기 소리가 천둥소리로 가슴을 찍고 비릿한 물냄새 풍기는 듯하고 가슴의 먹장구름이라도 하늘로 올라갔으면--- 꿈틀대던 사행천의 허물이 태양 아래 하얗다 (이덕완·시인, 1954-) + 가뭄이 따라 온다 이글거리는 가뭄은 강에서부터 시작한다 강바닥이 흰 배를 드러내면 산으로 기어오르고 물기조차 없는 용 닮은 구름이 가뭄을 입에 문 채 발길마다 따라다녀 바닥난 저수지에서 죽음을 옆에 끼고 입 벌린 고기새끼 하늘을 쳐다본다 타는 아스팔트 옆에선 그을린 무궁화나무 그래도 색 고운 꽃은 피는데.... (최풍성·시인, 전북 임실 출생) + 가뭄 아스팔트가 뛰어 오른다 달리던 자동차가 멈추고 멀미를 한다 통곡으로 기절하는 나무 이파리 하얀 거품만 한없이 내뱉고 있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에는 나락의 상여 메는 소리로 가득하고 풀벌레 날갯짓도 멈추어 섰다 가난한 농부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빗소리의 환상 목마름으로 일렁거리는 대지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단내 나는 팔월의 태양은 등에 달라붙은 바람을 풀어놓고서야 서산마루에 드러눕는다 어둠이 내려도 꿈을 꿀 수 없는 날이다 안되겠다, 내일은 저 이글거리는 태양 속을 열어 보아야지 (김정호·시인, 1961-) + 비가 그리운 날 건조한 피부에 비가 내렸다 갈라진 가문 땅에 빗물이 스며드는 소리가 오래 잠든 강을 깨웠다 묶였던 배가 풀려났다 십리밖에 있는 친구가 낙숫물 소리 풀꽃 목 축이는 소리 새들 날개 터는 소리를 빗줄기에 엮어 보내 왔다 돌려줄 것이 없는 나는 강에 그려지는 동그라미 하나를 소리로 뽑아 올려 작은 눈설미에 넣어주었다 목 타는 가뭄이 풀려났다 (강영환·시인, 1951-) + 가뭄, 그 웅덩이 어느 해 여름 지독한 가뭄으로 내 사지는 말라 널브러져 폐허가 되었다. 시간이 무섭게 상처를 키우는 동안 뜨거운 모래 사막에서 조금씩 나만 아는 웅덩이가 패여 갔다. 웅덩이는 무척 어둡고 좁았지만 오히려 어둠 속에서 내가 잘 보이기 시작하였다. 산만큼 높은 침묵을 안고 나는 차츰 웅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허만이 독차지하는 푸른 웅덩이. (장순금·시인, 부산 출생) + 가뭄 - 마흔살·9 한 뿌리에서 자란 산 가지와 죽은 가지가 다른 생각으로 손을 허공에 뻗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 속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운명을 달리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말라가는 가지는 자신의 몫을 버려야만 남은 가지의 이파리가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퍼런 육신으로 끊임없이 도랑물을 퍼올리는 산 나뭇가지는 그렇게 시퍼렇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죽은 나무의 몫까지 대신 살아야 할 이유가 5월 목마름을 끊임없이 이겨내고 있습니다 (문정영·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