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든다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흔든다 먼지가 앉은 나비 날개를
흔든다 나비가 앉은 꽃잎을
흔든다 꽃이 잠자는 화분을
흔든다 화분이 놓인 탁자를
흔든다 탁자가 놓인 바닥을
흔든다 바닥 아래 지하실을
흔든다 지하실 아래 대지를
흔든다 대지를 둘러싼 지구를
흔든다 지구를 둘러싼 허공을
흔든다 허공을 둘러싼 우주 전체를
(함기석·시인, 1966-)
+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구상·시인, 1919-2004)
+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다
잠시
나의 집이
휘청-한다
(강은교·시인)
+ 우주를 보다
풀잎 위
이슬 한 방울쯤이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보다 크다
손가락에 적셔
가지고 놀려 했다
오늘 그것에
깔리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박창기·시인, 1946-)
+ 새
새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노래를 한다
지구 한 귀퉁이가 귀 기울인다
새 떼가
하늘을 날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반짝인다.
(박두순·아동문학가, 경북 봉화 출생)
+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시인, 1954-)
+ 달팽이 한 마리가
겹벚꽃 그늘 아래서
달팽이 한 마리 더듬더듬
나무를 기어오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등짐 진 그의 무게만큼
하늘은 자꾸만 기우뚱
내려앉는데
놀라워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지구를 끌고 가는 힘
(최춘희·시인)
+ 꽃씨를 심으며
희망은 작은 거다
처음엔 이렇게 작은 거다
가슴에 두 손을 곱게 포개고
따스한 눈길로 키워주지 않으면
구멍 난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그렇게 쉽게 잃어버리는 거다
오늘 내가 심은 꽃씨 한 톨이
세상 한 켠 그늘을 지워준다면
내일이 행여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은 작게 시작하는 거다
(홍수희·시인)
+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깃털 하나
거무스름한 깃털 하나 땅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들어보니 너무나 가볍다
들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 한다
한때 이것은 숨을 쉴 때마다 발랑거리던
존재의 빨간 알몸을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깃털 하나의 무게로 가슴이 쿵쿵 뛴다.
(안도현·시인, 1961-)
+ 저런 게 하나 있으므로 해서
저런 게 하나 있으므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없는 듯
강폭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작은 돌섬 하나
있으므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길 하나 생겨난 거지
(정세훈·시인, 1955-)
+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메리 R. 하트만)
+ 어느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무엇무엇 따위의
하찮은 것들
그 가치가
보잘것이라고는 없기에
아무도
그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는
그런 것들을
나는 꾸준히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감사함의 표시로
한시도 날
떠나 있지 않는다.
(원태연·시인, 1971-)
+ 어린것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시인, 1966-)
+ 제자리
급류(急流)에
돌멩이 하나 버티고 있다.
떼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안간힘 쓰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잎처럼
풀잎처럼
흐르는 물에 맡기면 그만일 텐데
어인 일로 굳이 생고집을 부리는지.
하늘의 흰 구름 우러러보기가
가장 좋은 자리라서 그런다 한다.
이제 보니 계곡의 그 수많은 자갈들도
각각 제 놓일 자리에 놓여있구나. 그러므로
일개 돌멩이라도
함부로 옮길 일이 아니다.
뒤집을 일도 아니다.
(오세영·시인, 1942-)
+ 한 걸음
한 걸음이 당신을
그리 멀리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걸어야 합니다.
한마디 말로 당신 자신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말해야 합니다.
한 인치가 당신을
크게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행동해야 합니다.
(복음의 수난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그리스도인)
+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이나명·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 그 한 사람을 생각함
살아 있는 시간마다
그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의 어제와 슬픔을 생각하고
오늘의 고난을 생각하고
내일의 허망을 생각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란
참 하찮은 것입니다
고사리를 볶아서 된장찌개를 끓여서
내 손맛의 소찬을 함께 먹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
참말이지 눈에 띄지도 않게 작은 것입니다
아무도 몰래 입춘 지난 어느 날
꽃샘추위 속에서 향기 머금어 핀
남매화 여린 꽃잎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의 환희와 남루와 고뇌
그 한 사람의 질병과 절망과 분노를 생각하는 일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의 전부를 생각하는 일이
인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김용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