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에 관한 시 모음> 김지하의 '산책은 행동' 외 + 산책은 행동 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김지하·시인, 1941-) + 산책길에서 세상맛이 제아무리 모래알 같다 하지만 그래도 가다가는 우리들 허전한 삶이 저 언덕 찔레꽃 향기로 필 때도 있잖은가. 천 평도 더 넘는 목화송이 구름을 가꾸기도 하고 물무늬 햇살무늬 마음밭에 찾아와 푸른 깃 조용히 펼쳐 하늘을 날 때도 있잖은가. (김필곤·시인, 1946-) + 아침 散策 새벽 숲 눈썹 닦아 오솔길을 열고 간다 해맑은 풀잎 끝에 샛별이 문득 지고 도랑물 건너뛰다가 눈이 부셔 돌아본다 (강세화·시인, 1951-) + 아침 산책길 - 안면도 하늘과 바다를 안개가 더듬고 있다 흐린 시야 속에 물결 소리만 선명하다 저만치 물러간 수평선 낯선 바다 속에 나를 담근다 썰물이 남겨놓은 물무늬 밟으며 어제, 오늘을 하나로 묶는다 안개 위로 햇살이 번지고 솔 향기로 다가오는 아침 고요, 혼자가 되는 적막을 지우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발걸음과 해조음 소리마다 네가 있고 내가 있어 푸른 안개 속에 하나가 되는 해변을 걷는다 (목필균·시인) + 산책 푸른 햇살로 방금 칠해논 산길, 첫나비 등에 업혀 산수유꽃을 만났다. 밤새 길어 올린 부엉이 눈물 그 진한 기도가 섞인 산물을 수혈 받듯 마셨다. 풀잎들 자꾸만 바지를 잡아 내렸다. 몸은 황사 속을 바둥대나 마음은 종일 산수유에 입을 댔다. (김영호·시인, 충북 청원 출생) + 산책 오늘은 종일 안개비 내려 님의 가슴에 산책 다녀왔다 님도 어디로 산책가신 건지 방문 열어두고 빈 가슴이셨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빈 가슴 혼자 지키다 왔다 (강인호·시인) + 저녁 산책 내가 그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대는 그 점을 알기나 하는지, 그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죽어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내가 그대를 잃어야만 된다면 그보다 앞서 호흡을 잃기 바라노라 새소리 높이 뜨고 물소리 더욱 흘러 내 마음엔 그대뿐인데… 내 마음엔 그대뿐인데… 들일 마치고 돌아가는 농부들은 피로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가? (정숙자·시인) + 행복한 산책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넝마, 덜거덕거리는 오래된 절간의 목어처럼 걸려 버렸으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았네 그저 한없이 걸었다는 기억 기억 속의, 수많은 발자국과 그림자들 찬란히 빛나는 검은 뼈 어둔 밤 숲속 길을 밝히는 오래 묵은 인광 그랬었네 아마 전생의 산책이었는지도 모르지 길이 끝난 것 같은 곳에서 난 내게 전화를 건다 이젠 길이 끝난 것 같다고 펄럭이지 말고 후두둑 무너지라고 (노혜경·시인, 1958-) + 저녁 산책 마음은 저만치 흘러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 속으로 밤이 들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신발끈 느슨하게 풀고 저녁 어귀를 푸르게 돌아오던 그날들 노을빛으로 흘러내리던 기쁜 눈물들 그리움으로 힘차하던 그 여름 들길들 그때 나에게는 천천히 걸어가 녹아들 저녁의 풍경이 몇 장씩 있었으나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몸 바깥, 창궐하는 도시 밖으로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텅 빈 항아리에 금이 간다 어둠이 더 큰 어둠 속으로 터져 나간다 (이문재·시인, 1959-) + 산책 안개 속을 들꽃이 산책하고 있다 산과 들꽃이 산책하는 길을 나도 함께 간다 안개 속 길은 하늘의 길이다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안에 나도 들어가 걸어간다 그 속으로 산이 가고 꽃이 가고 나무가 가고 다람쥐가 가고 한 마리 나비가 하늘 안과 하늘 밖을 날아다니는 길 발 아래는 산, 붓꽃 봉우리들 안개 위로 올라와서 글씨 쓴다 북과 피리의 이 가슴길에 골짜기 고요가 내 발을 받들어 허공에 놓는다 써 놓은 글씨처럼 엎질러진 붉은 잉크처럼 아침 구름이 널려 있다 이 붓꽃에서 저 붓꽃으로 발을 옮길 때 안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세상이 내 눈 안에 음악으로 산다 안개 속을 풀꽃 산 더불어 산책을 한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