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겨울이
어둡고 쓸쓸한 까닭은
이슬, 꽃, 나비……
이렇게 작은 생명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랍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소리 없이 날며 반짝거릴 때
온 누리는 매일매일
명절처럼 풍성했지요
옥수수밭엔 풍뎅이가,
나뭇가지엔 거미줄이,
언덕에는 제비꽃이,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게 되려면
그처럼 약한 생명들이
한껏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새 봄이 그렇게도
곱고 포근한 까닭은
이슬, 꽃, 나비……
그토록 조그마한 생명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랍니다.
(정숙자·시인)
+ 어린 생명
생명, 특히나
어린 생명은
반짝,
반짝인다
피라미, 송사리, 갈겨니,
금강모치, ……, 납자루의 어린것들
맨살로 스치며
간지럼을 탄다
물결, 잔물결로
그저 마냥 설레고
살랑살랑, 랄랄랄랄
또래춤을 춘다
타고난 흐름
그대로의 빛남
반짝이는 힘으로
온 물은 일렁인다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생명
천둥 번개 칠 때
빗줄기 타고 내려왔는가.
한여름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미꾸라지 한 마리,
소나기 그치고 햇빛 쏟아지자
한 종지만 남은 마당 빗물 물고
구불구불 몸부림치더니
다시 봇돌로 가버렸는가.
빗물 마른 마당가에
햇빛 받아먹은 봉선화가
새빨갛게 피어 있다.
(권달웅·시인, 1944-)
+ 생명
오오
환희여
빛의 떨림이여
갓 태어난
고귀한 작은 생명
아이를 볼 때면
생명이 얼마나
신비하고
불꽃이 일고 있는가를
어느 누가 만든
창작품이 이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람의 뱃속에서
열 달을 견디며
작은 생명은
엄마의 숨결로 채워지고
어느 누가
다듬어 놓은
조각이 이보다 더
오묘할 수 있을까
꿈틀대는 몸짓
해맑은 웃음
솜털쟁이
하품쟁이
아가의
맑은 눈망울에는
온 세상이 천진한
사랑으로 물들어.
오오
생명의
완성이여
잉태의 신비여
(김세실·시인, 1956-)
+ 우리 생명 있기 전
우리 생명 있기 전
그 전, 그때
저 하늘 저 품안에
저 별 저 달 있었던가
그 시절 그때에서
솔바람, 꽃숨결이
지금처럼 불었던가
푸른 솔
흰 두루미
뭉게구름
꽃무지개
청아한
산새 노래
푸른 바다
흰 갈매기
철썩철썩 파도 소리
그 시절 그때에도
지금처럼 있었던가
우리 생명 있기 전
그 전 그때도.
(瑞耕 김대원·시인)
+ 대지가 품는 생명
거친 세상
발아의 의지로
씨앗을 품고
부드러운 살갗은
햇살을 애무하여
여린 풀꽃을 피우고 있다.
하늘은 끝없는 시련으로
땅 위 모든 것을 연단하고
평생을 객 되어 떠돌다온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육신을 누이리
슬픈 비애를
빈 어깨에 짊어진
그대의
지친 걸음인들 어떠리
대지는
어머니의 가슴을 열어
생명의 포자를
영원히 간직하나니
(김옥남·시인, 1952-)
+ 생명에 물을 주듯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아놓고
뿌리를 달고 있을 때보다
더 오래 살아달라고
빌고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생명은 생명이 눈을 뜰 때부터
그런 식으로 사랑받기를 싫어하는데
순이를 사랑할 때에도
그런 식으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더욱이 순이의 몸에 손을 댈 때에도
그런 식으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사랑이란 뿌리를 다칠까봐
삽질을 그만두고
손톱이 닳도록
손을 어루만지는 거지
(이생진·시인, 1929-)
+ 생명(生命)
생명은 하늘에서 온다.
하늘이 따뜻한 봄바람으로
세상에 사랑의 기운 불어넣으면
나무에서 꽃이 피고 알에서 새들 깨어나듯
엄마 아빠를 닮은 귀여운 아가들이 태어난다.
생명은 순결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들과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노루새끼들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작은 물고기들도
잠들어 있는 아가의 얼굴처럼
죄 있는 것 하나도 없다.
생명은 자란다.
나무는 굵어지고 숲은 넓어져
가지마다 새들 깃들여 온갖 소리로 노래하고
아가들은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나
과학자가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한승수·시인)
+ 우포늪 생명
우포늪 생명 들먹이는 사람들
웅성웅성 행사인지 뭔지 떠드느라
"너희들 뭐하니"
우포늪이 묻는 소리
아무도 못 듣는다
왜 고요 깨트리고 초목들
움츠리게 하는지
얼굴 찌푸리며
묻는 소리 아무도 못 듣는다
우포늪 묻는 말이
우포늪 생존의 천리임을
까마득히 모르고
사람들 저희끼리 소란스럽다
(오하룡·시인, 1940-)
+ 생명나무
어둠 속에서
한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어찌나 큰지 처음엔 나무인 줄 몰랐다
작은 나무에 가리어
그 몸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위 껍질 같은 나무에 바짝 붙어 서서
고개를 뒤로 꺾고 올려다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하늘을 찌르고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구불구불 곧게 올라간 모양이
땅속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는 듯
머리 숙여 나무 밑을 살피니
하늘 기운이 뒤엉킨 거대한 뿌리로
뻗어내려 땅 속 깊이 스며들고 있는 듯
끊임없이 오르고 내리는 그 기운에
개미만한 내 몸은
살려는 힘으로 요동을 쳤다
(김종희·시인,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