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시모음> 정소슬의 '어머니의 국시' 외 + 어머니의 국시 평상 위에 먼저 자리잡고 앉은 달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어머니 백발만 같은 국수 아닌 국시가 사발 안 비좁도록 똬리를 틀었고 허연 머릿결 사이로 쿡 질러 넣은 젓가락은 영판 어머니의 은비녀다 나는 혹, 그 쪽머리가 풀릴까봐 차마 젓지를 못하겠는데 달빛은 허기를 채우느라 후룩 후루룩 바쁘다 ......어지간히 배를 채운 달빛이 저만치 비켜나 앉고 눈시울에 괸 그리움만큼 굵어진 면발이 어머니의 은비녀에 휘감겨 꾸역꾸역 목젖을 기어 넘는다. (정소슬·시인, 1957-) + 국수 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 좋다 퉁퉁 부은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길 위에 자동차 꿈쩍도 하지 않고 길 위에 몇몇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오렌지색 휘장이 커튼처럼 출렁인다 빗물을 튕기며 논다 알 수 없는 때 소나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소주를 곁들일까 뜨거운 것을 뜨거운 대로 찬 것을 찬 대로 (이근화·시인, 1976-) + 비빔국수 밀가루로 만든 것은 국수이고 밀가리로 빚은 것은 국시라고 깔깔 그리면서 이 저녁엔 딸애가 말아 온 비빔국수를 먹었다 부침개도 얼마쯤 부쳤고 갈비도 좀 곁들였지만 더운 여름날 저녁 한바탕 웃음을 반찬으로 한 비빔국수가 특미라고 칭찬하며 바른 말로 나는 흡족해 했다 내가 국수를 좋아한 것이 언제쯤부터인지는 기억이 없다 날씨가 더우면 냉콩국수 기후가 좀 서늘하면 이바지 국수 기온이 뚝 떨어지면 수제비를 청한다 제깍 제깍 대령하는 고마운 아내 지금 내 배가 조금 나온 듯한 것은 순전히 밀가루 탓이다 아니다 그 동안 거절하지 않고 조리해주는 아내 탓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국수를 좋아하는 바로 내 탓이다 아무렴 어쩌랴 이 나이에 배가 조금 나와 보인다고 한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칼국수 어머니 오셨다 통일호 밤열차 달려 천리 길 오셨다 세 살짜리 한규 녀석 제 세상 만났다 둘러앉은 자리엔 함박웃음 넘쳐흐르는데 국수를 민다 어머니 손때 그립던 칼칼한 칼국수 어무이요, 딘장 풀까예? 그려, 호박뎅이도 좀 썰어 눠 경상도 며느리 강원도 시어머니 오늘 우리집 다정한 모녀 만났다 (고증식·교사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정진규·시인, 1939-) + 옛날 칼국수집 고향 냄새가 나는 듯 구수한 옛날 칼국수집 좁은 마당 가로질러 툇마루 걸터앉아 신을 벗는다 반기는 듯 마는 듯 늘 보던 정겨운 사람처럼 미소로 보내는 주인 아주머니 인사가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고리처진 낯익은 주전자 막걸리 한잔에 시커먼 속들이 씻겨진다 생존을 벗어난 이름 없는 시인들의 웃음 속에 시계바늘 너그러이 멈춰있다 풋고추 더 주세요 하는 소리에 툇마루 천정 서까래가 웃는다 (박상희·시인, 1952-) + 행복 칼국수집 어스름 밀려올 때 손 전화 소리울림 아끼던 제자 녀석 포장마차 열었다며 오늘은 꼭 와달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아버지 술주정에 가족은 웃음 잃고 어머니 집을 떠나 소식은 끊어지고 남동생 가출하여 함께 만든 포장마차 파주시 우체국 앞 통행로 골목길엔 갓 스물 앳된 소녀 청춘을 앞 두르고 칼국수 숭숭숭 써는 힘겨운 손놀림 입구 쪽 가슴팍에 양심을 걸어 놓고 칼국수 빚는 손길 행복한 포장마차 우리는 술을 절대로 판매하지 않아요 제자의 어릴 적 꿈 의상실 디자이너 술주정 아버지는 희망을 다시 찾고 지금은 행복을 빚는 맛 요리사 되었죠. (최봉희·시인, 1963-) + 황고집 칼국수 부안 바닷가 갯벌에서 바지락 캘 때 딸려온 여자가 있습니다 산행을 마친 나는 자주 바다를 만나러 갑니다 진달래 안부를 잊지 않는 그녀 까만 눈 속에 그리운 진달래 한 송이 피었습니다 밀가루 범벅된 그녀의 손에선 동화 속 늑대도 나왔다 가고 살아온 날들만큼 함박눈이 날리기도 해서 꼬마들은 곧잘 주방을 기웃대곤 했지요 국수 솜씨만은 못하더군요 그녀의 글씨 '바지락칼국수 4000원' 천 원을 더 올리지 못하는 황고집 부부 손님들은 메뉴판에 그려진 바다를 보며 턱을 괴고 천 원어치의 꿈을 꾸고 서해 갯벌에 박아놓은 아린 조개 캐어 나르느라 남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뻘 속의 낙지가 되곤 한다더군요. (고경숙·시인, 1961-) + 대전역 가락국수 늦은 밤 피곤한 몸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비닐 봉지에 담긴 국수 한 움큼을 끓는 국물에 금방 데쳐 한 그릇을 내준다 2,000원 짜리 가락국수인지라 내용이 서민적이다 단무지 서너 조각이 국수 그릇에 같이 담겨져 있고 쑥갓 조금 약간의 김 부스러기 고춧가루가 몇 개 둥둥 떠있다 시장 탓에 후루룩 젓가락에 말아 넘기면 언제 목구멍을 넘어갔는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기차를 기다리며 막간을 이용하여 먹는 가락국수의 맛은 그만이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국수 고향 찾아갈 때는 관방제 초입 포장친 집에 들러 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 처마 밑 비집고 들어서 틈서리 목로에 자리잡고 앉으면 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 그냥 왔다시며 허리춤에 묻어온 박하사탕 몰려든 자식들에게 물리시던 어머니, 훈훈한 미소 뒤에 갈앉친 허기진 그 모습 원추리 새순처럼 솟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 (강대실·시인, 195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