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지만
내게는 분명 처음인 이 길은 얼마나 큰 설렘인가.
(반칠환·시인, 1964-)
+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박노해·시인, 1957-)
+ 길 위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아직 가지 않은 길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었으랴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고은·시인, 1933-)
+ 길
나는 알고 있다
꼬부라진 길모퉁이 지나면
아름다운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그 길 지나면
또 다른 내리막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길 지나면
힘든 오르막도 있지만
그 옆 옥수수 밭에서 잠시 쉬어 가면 된다는 것을
그래도 늦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길을 가다가 쉬어가도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바쁘다
(홍세희·시인)
+ 모든 길
모든 길은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이다
단 한 뼘의 길도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것
늦게 배운 자전거가 가르쳐준다
춘천에서 속초를 향해 가는 길
느랏재 가락재 말고개 건니고개
오르막이면서 곧 내리막인 그 길
미시령을 넘어서니 바다다
바다, 그 또한 끝없는
오르내림의 반복
그러면서 배운다
봄이 오기까지는
모든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
(권혁소·시인, 1962-)
+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이문재·시인, 1959-)
+ 길
십수년 찌든 벽을 도배하려고
액자를 떼어냈다
아하, 외줄로 뻗쳐있는 까만 길
우주에서 내려다본 만리장성 같다
담배씨같이 자잘한 개미들이
큰짐승 눈을 피해 숨죽이고 나래비 서서 다닌
고 작은 발자국들 세발세발 쌓인
길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는 차마고도
님 마중하는 꿈길마다 바윗돌 부서져 모래가 되었다는
옛 노래처럼 작은 빨빨거림이 몽쳐
우주를 꿰뚫은
노래
(차영호·시인, 1954-)
+ 길이 되어 누워 보니
한두 번 밟혀서 길이 되었으랴
길이 되고도 이름을 갖기까지
얼마나 더 다져졌으랴
천만 번 밟히고도 아니 기죽고,
안으로...
그럴수록 안으로 단단해지고
밖으로 넓어진 삶이겠구나
유년의 기억같이 흐릿한,
좁다란 고갯길이
점점 더 넓어지고 포장이 되고,
결국은 이름을 갖게 되는 것
기죽지 아니하고
단단히 밟힐수록
다짐한 까닭일 테지
육신이 밟히는 일은
서러운 게 아니구나
많이 밟힐수록
지워지지 않는 길이 되어
누워 보니....
(장남제·시인, 경남 사천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