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예 그리 슬프랴
(박용주·시인, 1973년 광주 출생)
* 박용주는 1988년 4월에 쓴 이 시로 전남대가 주최한 1988년 '5월 문학상'을 수상한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15살이었고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다.
+ 묵념 5분 27초
(황지우·시인)
*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시. 그러면서도 많은 얘기를 한다. 여기서 '5분 27초'는 광주항쟁에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 5월 27일을 의미한다.
+ 5월 - 젊은 죽음을 위하여
잊혀지지 않는 그 어느 해 늦은 봄
5월의 통곡 소리
하늘이 무너졌다네
삼천리 산하
동강난 허리
울음 그칠 날 없었는데
초여름 날 남쪽 하늘 붉은 피 검게
타오르네
민주여 자유여
부르짖던
호남의 뜰 광주의 젊은 넋이여
총칼 앞에 민주의 한을 노래하고
봉오리 꽃피우기 전에 독재의
폭풍 속에
떠나신 님이여
5월 18일 오늘은 잠든 님
그대 영혼은 민주의 들꽃 한 송이
자유의 품으로
활짝 피우겠습니다
님이여 편히 잠드소서
영원한 자유의 종 곱게 꽃피우리라
(장수남·시인, 1943-)
+ 5월 18일
비가 내립니다
그것은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비여야 합니다
그날의 울부짖음이 이제는 단비가 되어
타는 목마름을 적셔 주어야 합니다
비가 내립니다
30년 전 아픔이 씻겨 내리며
대지를 적시고 사람을 적시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목마르지만
오늘 눈물처럼 내리는 이 단비는
다시 천년의 민주주의를 이어갈 거름이 될 것입니다
비가 내립니다
어쩌면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상처 난 가슴을 적시는 아픈 이 비에
오늘 대한민국이 젖어듭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울어도 좋습니다
(이선명·시인, 1978-)
+ 금남로
사랑이 넘쳐흐르는 거리였었다
희망이 잠들지 않는 거리였었다
억눌린 사람들의 정직한 목숨이
공기로 햇살로 빗물로 쏟아지던
오오 하느님 같은 사람으로 넘실대던
낭만이 넘치는 사람의 거리였었다
밝은 그 거리에
사람과 하느님과 모든 생명들이 하나가 된 그 거리에
도깨비 같은 총탄이 쏟아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음모와 욕망이 쏟아져
삶과 죽음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하느님과 사탄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분수대조차 말라버린 그 거리에는
슬픈 꽃 한 송이도 피지 못하였지만
한 많은 그 오월의 십자로에
스러져간 벗들에 대한
어둡고 긴 기억의 터널을 지나
우리들의 사랑은 또다시 타오르고
무등산 바람은 시퍼런 눈빛으로 다가와
하느님 닮은 사람들 가슴에 청솔을 심어놓는다.
(홍관희·시인, 1959-)
+ 무덤 앞에서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 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나는 오지 않았다 상원아
쓰러져 누운 오월 곁으로 네 곁으로
나는 그렇게는 올 수 없었다
승리와 패배의 절정에서 웃을 수 있었던
오 나의 자랑 상원아
나는 오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
나는 네 주검 앞에 올 수가 없었다
그따위 짓은 네가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김남주·시인, 1946-1994)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 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그들은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김준태·시인,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