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아주 잘 이해하시는군요. 그래요. 불의 비선율과 선율의 요소를 꺼내는 시도입니다.
노예와 자유는 맞지 않는것 임에도 공존합니다. 삶의 양태나 사물이라는 것은 그런 논지에 벗어나는 건 없습니다.
이 물질계에서는 아주 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소설적 허구를 빌려서 가설을 펼친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황당한 일들 뿐이지요. 소설보다 더한 현실이라는건요.
요즘 떠들썩한것이 밀양 집단 강간 사건인데. 어느 날 어디에선가(꼭 우리들의 강박관념이나 편집증이 아니더라도...) 내가 알수 없는 곳에서
이 선율은 언제나 연주되고 있는거 같아서요.
기도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는곳에서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 할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하여주시고...'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역사의 성질을 주관하는 존재 (물질로 치자면 원자안의 전자와같은 존재)이면서 이탈괘도에 쉽사리 탑승하는 거지요.
'운명은 없다. 정해진 미래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입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일단 육체부터가 그 정신의 수효를 감당하지 않습니다.
곧 정신분열과 편집증과 강박관념과 각 종 인간을 초월하는 율법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육체의 괴리를 이기기 위해서 육체를 버리는 쪽으로 정신은 유도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상계에서 육체를 버리고 살 수 있는 정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태당하는 종족이라는 관념. 소외. 멸시. 노예근성을
우리는 쉽게 붙잡고 있는 셈입니다.
미래를 본다는건 과거를 아직 놓지 않았다는 거와 같습니다.
스스로의 형벌을 가함으로써 용서없는 현상에 굴복하면 찾아오는 능력입니다.
신은 우리를 괴롭게 할뿐인 허상이라는 의식들에서 우리의 분열시대가 오기 시작하였습니다.제가 한 시대를 살다가는 구성원으로써 사단(惡)의 주장을 극명하게 시에서 표현하는걸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시가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표현예술이라는데에 그 본질이 있기때문입니다. 제 눈이 보는 것은 사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시인은 정말 행복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곰팡내나는 우상의 선지자와 다를것이 없습니다.
저의 태마는 암흑속에서 빛을 찾는 시도이며 그 어둠의 우물 안에서 끌어 올려진 차가운 물이고 싶었습니다. 전 신앙시가 아닌 신앙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있습니다. 제가 믿는 신에게는 범죄하였고 사단에게는 커다란 기만이었을껍니다.
시인은 그만큼 고독한 사람일 수 밖에 없는거지요. ^-^
하지만 저는 그것과 다른 하나를 꼭 가지고 있어요.
제가 진정 사방팔방 주제도 모르고 나 뒹굴수 있고 막말 할 수 있는 자유함을
가지게 되는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종입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습니다. 늘 님의 시 잘보고 있습니다.
^-^ 늘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