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만큼 보인다. 상대방이 여는 것이 아니다.
학문이나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왕자와 거지의 동화에서도 황제의 옥쇄를
왕자는 왕가를 상징하는 것인줄 알고 귀히 여기지만
거지인 톰에게는 그저 호두까는 도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가치나 진가는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흔히 쉽게 말하길 "여는 만큼 상대도 연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OPEN MIND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관계에서 내가 연다고 해서 다른이들이 여는 것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해볼 길도 없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눈에 보이거나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닌이상
그저 짐작하고 그 사람의 반응으로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자신이 열었다는 것도
자신의 의식일뿐이지 상대가 그것을 실감하고 있는지도 확실하게 알 길은없다.
열림은 '느낌' 이기때문이고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자신이 확실히 열렸다면 상대와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
열리는 만큼 마음에 부딪혀오는 것과 울림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을 닦아서 보면 좀더 깨끗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지만 거울에 확실하게 비춘다고 해서
옷차림을 바꾼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확률은 확실히 50:50이다
그것은 상대의 주체적인 선택에서 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리지 않은 사람이 비추는 상은 이그러진다.
금이 간 거울이 상을 비뚤게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나의 상처를 알면 상대의 상도 보정이 가능하게 된다.
거울의 상처부분을 알면 어느 정도 상을 보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대화하는 상대의 거울인 것이다.
이야기하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열림으로서 그 사람은 좀더 분명한 자신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더 열것인가 말것인가는 상대의 선택권한이다.
"내가 이만큼 열었으니까 너도 그만큼 열어야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강요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진실된 열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된 열림은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상태 또한 의심해보아야 하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잃는다.
"부처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는 말은 일견 헛말이 아닌 것이다.
느즈막히 일어나 세수도 안한체 미역국에 밥 말아먹고,
대장금 보다가, 엄마가 감자부침 한다고 온 집안을 연기로 가득 채울 때
문.사에 들어왔지요.^^
흠..문.사가 가족님들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가족님들 각자만이 알겠지요. 그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