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이란 논제하에 긍정론자와 부정론자를 들먹이는 것은
유교사상에 얽매이는 뒤쳐진 사상의 산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대반영에서 또 한 번 뒤쳐진 색안경 속 우리들의
시각은 저마다 또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굳이
중립에 선다면 칼날앞에 근사한 인생을 투자함이나
선조들의 피가 섞인 소중한 육신을 보존 한다는 효행(孝行) 두가지 중
어느 하나에도 소속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주관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주 경우없는 주장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긍정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있다.
사람이라는 무궁무진한 욕심의 주체를 두고 욕망의 제한을 둔다는 세상은 생각보다 만만한 대상이다.
그 만만함이란 살아감에 있어서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성형은 그 예시와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실태가 이렇듯이 말이다.
-성형한 미인의 풍만한 가슴과 다리에 촛점을 두는 첫인상의 진행형은 그 사람의 직장을 선물한다.
-반면 평범한 여인의 유능한 능력은 그 가슴과 다리 앞에서 그저 평범해질 뿐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논리에 질려할 지도 모를 사람들은 성형의 소요가 없는 사람임과 동시에
그 성형의 소요와 공급을 반대한다는 부정론자들은 긍정론자들의 걸림돌이며, 격하게는
인권침해자다.
성형은 누군가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권리다.
아름다워질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가진다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긍정론자는 부정론자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긍정론자는 그저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뭇 남성들 또는 여성들에게는 시들어가는 시간에서
오랜만에 두근거림을 제공하는 감정의 제공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부정론자들은 주장은 제한되지만 그 의미는 우리의 현 실태를 적나라 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을 투자한다는 명목아래 자신의 몸을 시간과 돈과 자존심을 주고 고친다는 것은
의지박약과 무의미한 성과를 거두려는 욕심을 말하는 것 뿐 정직한 투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권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인권이 편의주의에서 파생되어나온 욕심이라는 시각으로 읽혀지기 때문에..
또 그 시각으로서 반영되는 그 삶이, 참된 인생을 외치는 세상에서는 얼마나 보잘 것 없어지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음으로 한편으로는 옹호하고픈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사실 그 초점은 의지에 대한 훈계이자 마지막 외침이다.
융통성이 만들어낸 부작용과 그 효과는 당신의 무덤으로까지 지속된다.
새로운 성형기법이 개발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생각보다 가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생전 잘 꾸며져 있었던 육신이
만족스럽고 찬란했던 생을 마감하여 흙이 되고 난 후에도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당신의 썩어버린 육신을 몰아내고
당신의 의미없는 골격과 함께 관을 차지할 의미있는 무생물 덩어리들이
당신의 후예들에게 조상님 대접을 받지는 않을까?
사상을 들먹이면서 까지 성형에 이렇다할 입장을 내놓고 싶지는 않다.
인권침해이며 나만의 무덤 속에 남아있을 다른 의미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단지 평범하게 성형에 대한 깊은 인식 없이 브라운관에서만 바라보던 사례들은
우리에게 어떤 잣대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긍정론자와 부정론자의 개개인에게는
자신의 확고한 주장을 완고히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모두 다른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아야한다.
이런 부폐한 유행은 지나가야 하니까.
그래야 이상을 꿈꿀 수 있으니까.
성형이란 단어는 의학적으로 그 본질과 목적이 지금과 같지 않다.
지금 근처의 병원에 가서 누워있는 극심한 화상 환자나
본질적인 목적이 필요한 성형이 필요한 환자를 바라보자.
우리가 들먹이는 이 논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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