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이유는 생각보다는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사유의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 말하자면 100페이지는 써야 되지 않을까요? ^^ 그 중 산문과의 대비라든가 언어로써의 시에 대한 파악으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비교 우위를 갖기 위해 산문과 비교하는데요. 가장 유명한 말로써는...'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 위에서 솟아오른다. (le langage po tique surgit sur les ruines de la prose.)'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이고 창의성 없이 사물을 똑같은 태도로 바라보는 산문의 작법 형태를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 유명한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그의 미학 체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토대로 취급되는 '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이라는 글에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너무 길어 그와 관련된 부분만 옮겨 놓습니다. ^^ 시를 쓰는 이유를 알기 위한 사전 초석쯤으로써, 시는 어떻게 하여 태어나는가? 쯤으로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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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Ⅴ. 산문과 시
언어는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 불투명하기도 하다. 어떤 말이나 글 앞에서 내용보다 언어 자체에서 문득 마음이 빼앗겨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언어가 도구 아닌 사물로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물질성에 매료된 사람, 그는 아무리 예술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 순간에 이미 예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참여예술의 경계를 설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구분에서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영역구분이 무의미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그는 단지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는데, 그것은 오로지 예술의 질료를 사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도구로 생각하느냐의 기준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산문과 똑같이 말이라는 질료를 사용하는 시가 오히려 음악, 미술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 미술, 시를 예술이라고 지칭하고, 소설, 에세이, 팜플렛등 말을 사용하는 모든 글을 산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실참여는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장르, 즉, 산문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문으로 된 소설이 반드시 언어의 도구성에만 의존하고 그 사물적 측면은 도외시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이와 같은 단순한 이분법이 그의 문학론을 좀더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게 했으며, 나중에『집안의 백치』에서 그 자신도 이것을 부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작가는, 만일 그가 원한다면, 누추한 집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이 사회의 불의의 상징으로 삼아 독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회 비판적인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시는 어떠한가? 산문도, 시도 똑같이 언어를 질료로 사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소설가도 손에 힘을 주어 원고지 위에 글씨를 쓰고, 시인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거기에서 그친다. 작가는 자기 머리 속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색깔을 이것저것 골라 합성을 하듯이, 또 음악가가 이런저런 높낮이의 음을 합성하여 노래를 만들 듯이, 그렇게 단어를 이리저리 합하여 '시'라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산문이 의미작용의 작업이라면 시는 낱말이라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천진난만한 유희이다. 언어를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는 차라리 미술이나 음악의 영역과 가깝다.
기호의 왕국, 그것은 산문이다. 시는 회화, 조각, 음악의 편이다.
(l'empire des signes, c'est la prose; la po sie est du c t de la peinture, de la sculpture, de la musique.)
이때 우리는 시인의 말을 이 세계의 어떤 양상을 가리키는 기호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속에서 이미지만을 본다. 시인이 버드나무, 또는 물푸레나무라고 했을 때 그 말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실재하는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을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들이 가진 의미마저 완전히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미가 없었다면 말들은 그저 소리와 철자로 모래알처럼 흩어졌을 것이다.
'보라빛'이라는 세 글자가 하나의 통일성으로 단단히 묶일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의 색깔을 지칭하는 그 말의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시인이 그 말을 썼을 때는 현실 속의 진짜 보라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가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시어는 사물이다. 이처럼 언어를 사물로 보는 태도를 사르트르는 '시적(詩的) 태도'라고 부른다.
시인은 단숨에 도구-언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보는 시적인 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했다.
(le po te s'est retir d'un seul coup du langage-instrument; il a choisi une fois pour toutes l'attitude po tique qui consid re les mots comme des choses et non comme des signes.))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공식이 세워졌다. 소설가 또는 산문가는 말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시인은 말을 도구가 아니라 사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일'(contempler les mots de fa on d sint ress e)일 뿐이다. '바라보다'라는 것은 그대로 하이데거의 인식과 도구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위이며, 단지 그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르트르를 앞질러서, 시인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Ⅵ. 언어의 실패로서의 시
언어가 1차적으로 도구임에 틀림없다면, 그것을 사물로 관조한다는 것은 언어의 도구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도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언어 본래의 목적인 의사소통이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실패( chee)가 사르트르 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 위에서 솟아오른다\"(le langage po tique surgit sur les ruines de la prose.) 라는 문장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진해서 언어의 도구성을 거부한 사람이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실패가 그대로 구원이 된다.
애당초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와 같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아닐까? 예술이 아닌 현실 생활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어떤 목적의 수단이다. 내가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잡으려고 손을 뻗칠 때, 손을 앞으로 내뻗는 행동은 연필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도구성의 고찰에서 보았듯이 모든 수단은 투명하여 우리 눈에 안 띄고, 우리의 관심도 끌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연필일 뿐,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치는 행동은 부차적이고, 덜 중요하고, 비본질적인 가치일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목표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 관계를 전도시킨다. 원래의 목표가 흐릿해지고 중간 단계의 수단만이 남은 것, 그것이 그 옛날의 무훈담이나 춤이 아니었던가?
시(詩)야말로 이러한 전도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라면, 항아리는 물긷는 처녀가 그 속에 물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지만, 시에서는 그것이 물긷는 처녀의 우아한 자태를 위해 존재한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가 용감하게 싸웠겠지만, 시(詩)에서는 헥토르나 아킬레우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킨 시인에게 있어서 말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망가진 연장이다. 도구에서 도구성이 벗겨지면 거기에는 사물이 남는다.
유용성이 우리 행동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무용지물은 우리 행동의 실패를 뜻한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그것의 실재성과 개별성을 되찾고, 이번에는 인간의 실패의 도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말의 의미는 그 자체가 순수한 소통불능성이 된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말에 대한 순수직관으로 대치되고, 오히려 실패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이 생긴다. 사르트르 미학의 또 하나의 주요 개념인 '지는 자가 이기리라'(Qui perd gagne.)의 의미가 그것이다.
시는 '지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 자기가 죽을 정도로 패배한다.
(La po sie, c'est qui perd gagne. Et le po te authentique choisit de perdre jusqu' mourir.)
이 개념은 나중에 플로베르를 다룬『집안의 백치』에서 좀더 심화되고 확대되어, 19C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9C의 예술만이 아니라 산문과 대비된 시 전체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시인은 예술에서의 승리를 위해 실제 인생에서는 패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시인은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실제의 인생에서 실패한다고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현실에서의 실패가 시인의 원초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를 망가진 도구로 간주하는 행위가 어떻게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도구연관의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책꽂이는 책을, 책은 독서를, 독서는 연구를, 이런 식으로 이 세계는 촘촘한 망상(網狀)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구연관의 세계이다. 그 어느 것도 고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시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란 결국 모두가 나에 의해 행해져야할 어떤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책은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빗자루는 내가 쓰레질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계의 도구성의 전체는 정확히 나의 가능성과 일치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대자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가능성의 총화이다. 그렇다면 도구란, 사물에 투사된 내 가능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
다시 말하면 사물 속에 각인된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도구연관의 거대한 사슬로 이어져 있으므로 그 중의 어느 고리 하나만을 끊어도 전체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이 세계의 도구적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인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세계 안에서의 내 인생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가 결코 완벽하게 쓸모 있는 연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는 매체이다. ) 일상언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섬세한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문학 작품에서 시인의 머리 속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언어 이전의 어떤 생각을, 시인은 언어라는 기성품의 주물 속에 집어넣어 시를 만든다. ) 따라서 그의 시 작업은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실패( chec)라는 말은 도구연관의 세계 속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 뿐, 시인이 추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美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불운'(Guignon)이나 '저주'(mal diction)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집안의 백치』를 읽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던「문학이란 무엇인가?」제1장의 주(註)4번의 마지막 문장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산문의 이의제기는 좀더 성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면, 시의 이의제기는 패배의 이름으로 행해 진다. 그러나 그 패배는 모든 승리를 은닉하고 있는, 숨겨진 패배일 뿐이다.
(Mais la contestation de la prose se fait au nom d'une plus grande r ussite et celle de la po sie au nom de la d faite cach e que rec le toute victoire.)
이 문장을, 산문은 문학의 성공이고, 시는 문학의 실패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구적 측면과 사물적 측면에서 고찰한 언어의식의 결과이며, 또, 열렬한 참여문학의 외피로도 감추지 못했던 사르트르의 은밀한 미의식의 내비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