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힛..시니일기 댓글보구 와봤더니..이거야 원..ㅋㅋ
강요받은 선택과 타락한 진실이로군요.
그 어느것도 지킬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내 옷을 놔두지 않는다면 총부리는 그들을 향하겠죠.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예문으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기엔 뭔가 부족한 듯 싶습니다.^^
사람의 생명으로 선택 또는 진실을 논하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11.03
구름새님이 이 글에 부여한 제목이 선택 or 진실입니다.
선택이냐 진실이냐 인데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두겠냐를 물어보는것 아닙니까?
and를 사용했다면 달라지겠죠.
선택과 진실, 이렇게 한다면 둘은 동급이 될 수도 있으니 굳이 가치를 따질 필요도 없겠죠.
가치라는 단어가 적절치 못하면, 비중이라고 할까요.
사회전반에 걸쳐있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 바로 상식입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회인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이지요.
유치원에 가서 물어봤어도 얻을 수 있는 뻔한 답변이지요.
구름새님께서 상식을 넘어선다던가 벗어나는 상상을 바라셨다면 너무도 맹맹한 답변이었겠군요.
그리고 나와 노파라는 흑백의 명백함이라고 하셨는데 흑백을 두 가지로 나눠보겠습니다.
첫벗째, 논리적 오류의 예 중의 하나인 흑백논리입니다.
흑백논리는 사상과 행위의 범위를 지극히 제한하지요.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것이 다같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게다가 그들과 세 아이의 희생이 뒤에서 버티어 강요하고 있습니다.
흑백의 명백함이 있는 전제는 논거될 수 없습니다.
이런 흑백을 말씀하신게 아니라면 두번째, 단순히 관점을 나누신겁니까?
선택을 해야하는 나라는 관점과 선택을 당해야하는 노파의 관점,
두 가지의 관점을 논하고 싶었던 건지요.
이 경우 충분히 영화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며, 소설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죽이느냐는 상상의 한 가지일 뿐이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직막으로 여기는 토론방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따라 많은 생각들이 선별됩니다.
저의 매끄럽지 못한 글들이 구름새님에게 충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건 무리일까요.
또 답변 남기면 될까요? ^^
11.04
제가 형식을 갖고 늘어지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셨나봅니다.
분명 그 의도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목은 어떤 내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토론하고자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라면 제목이 당연히 핵심코드여야 하지요.
제목은 제목일뿐이고 핵심명제는 글 속에 있다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유치원생과 사회인의 상식적인 선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하셨습니다.
이 말을 사회인의 범주에 유치원생이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요즘 유치원에서는 놀기만 합니다. 사회성을 집중적으로 가르칠 뿐이지요.
사회성은 말 그대로 사회 혹은 집단생활의 성질을 습득하여 그 집단에 융화하는 것입니다
유치원이라는 집단, 혹은 앞으로의 학교라는 집단 그리고 나와 친구들, 선생님과의 관계 등등을 가르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가르치겠습니까?
상식입니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인간적 상식을 기준으로 가르칩니다.
제가 말씀드린 상식은 시사상식, 과학상식, 경제상식 등으로 나눈 것의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사회를 통틀어 지칭한 상식입니다.
구름새님이 제시하신 글은 사람의 생명과 인간관계를 비상식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이라는 이름하에 비상식적인 답변을 원하시는 겁니까?
제대로 된 토론의 화자라면 흑백논리든, 감정논리든 문제를 화자의 마음대로 주지 않겠지요.
흑백논리에서는 올바른 생각의 절차를 거친 답변이 나올 수 없습니다.
단 두 가지 길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유두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흑백논리에서 다른 유두리(?)는 없다는 전제를 붙일 수 있지요?
흠..그리고 물론 영화회의때 이런 문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한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지요.
다만 영화를 제작하고 스크린에 상영해서 관객이 보게 할 때 문제가 생기겠지요.
영화라 하더라도 결론은 낼 것 아닙니까?
나를 쏜다던지, 노파를 쏜다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총을 들었다라는 여운을 남기며 끝내겠죠.
제작자, 감독, 배우, 스탭들만 모여서 자신들만의 영화를 만듭니까?
관객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요.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아니느냐는 관객의 몫이겠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 대사, 감정들은 사회를 따라갑니다.
그 어떤 획기적인 영화라 할지다도 이미 그것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때문에
영화로 상영이 되는 것이지요.
모든 상상의 기반은 상식에 있습니다.
어느 순간 '상상'이라는 것이 머리 속에서 번쩍 거리는 건 아니지요.
늘 가지고 있던 생각,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보면 그것이 상상이라는
단어를 얻게 되는 겁니다.
저는 토론할 때 감정을 개입시킬 수 있다라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구름새님이 저의 흑백논리를 잘못 해석하신 것같군요.
대화와 토론은 다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 최적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토론입니다.
구름새님처럼 묻는 사람마음대로 물어놓고 이런저런 논리를 다 개입시켜 보는 것은 대화입니다.
구름새님은 여기서 대화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토론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토론하기를 바란다면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유두리, 논거리 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 사용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융통성, 여유라는 단어가 있고, 논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굳이 유두리, 논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문제의 질을 격하시키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무리 읽어도 구름새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힌트 속에 길이 있다하셨는데, 구름새님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힌트인지
이미 손안에 쥐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김완선 삐에로 도입부에서 띠리띠리 띠띠띠 띠리띠리띠띠띠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말도 못하는 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고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있는 삐에로가 좋아 (간들어지는 엑기스부분) 에에에에
난 차라리 웃고있는 삐에로가 좋아 에에에에 히히힝
다음분 말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