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현진건의 단편집 <운수 좋은 날>을 받았던 그날,
<나는 오늘 참 운수가 좋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늘상 그래왔듯이 좋은 기분을 한껏 만끽하고 난 다음에는
수순처럼 못 견딜 고통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 들곤 했다.
그날도 나의 모든 믿음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그 일이 생겨나지만 않았다면,
나의 운수 좋은 날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을 터였다.
하지만 그 일은 나와 그 앞에 버젓이 드러났었고,
지금의 난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을 맛>의 기분을 안고 있다.
-하필이면 <운수 좋은 날>을 읽을 건 뭐였담.
결국 현진건의 글 속,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은 최악의 날.
그리고 <운수 좋은 날>을 그에게서 건네 받았던 그날은
역시 내게 있어서도 최악의 날이었다.
현진건의 단편집 <운수 좋은 날>을 받았던 그 운수 좋았던 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극한 사랑을 주고 싶었던 그와 절망 같은 이별을 하고 말았다.
마치 그렇게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이별이었다.
정말이지 <운수 좋은 날>을 받으며 행복감으로 충만 되있던 나는
오직 그만의 운수 좋은 여자 친구가 되리라 다짐까지 했었다.
그랬던 내게, 아주 적절히 타이밍을 맞추어서
그동안의 행복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그의 또 다른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을 지니던 그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전해 듣고는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던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 없으면 죽어요.
그 사람은 당신을 만나면서도 날 버리지 못했던 사람.
그렇게 나와 몸을 섞으면서 몇 개월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그런 그를 용서 할 수 있나요?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당신에게 사랑을 줄 수 없었던 그를 용서 할 수 있나요?"
"당신은 용서 할 수 없잖아요!
당신을 속이고서 나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 왔던 그를 용서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난 달라요. 날 만나는 중에도 오로지 당신에게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도
언젠가 되돌아오겠지 꿈꾸던 나였어요.
그래서 그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날 버리지만 않으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둘로 양분이 된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다 용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들었던 당신은 한치의 감정적 티끌도 용납지 않는 분이셨지요.
그런 당신이 내 입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실체를 알고서도 계속 그와 만나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당신, 그를 용서 할 수 없을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그가 아니라도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요.
충분히 그럴 역량을 지닌 강한 분이잖아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난 그 사람이 간절해요.
이렇게 염치없이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 이야기 할 만큼 절실하다구요!
난, 그 사람 없으면 죽어요!! 죽어요!!"
"이런 내게서 당신이 그 사람 마음을 모두 가져가 버린다면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 돌려줘요!
그 사람을 내게 돌려 줘요!"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의 말은 속사포처럼 연이어서 들려왔다.
너무나 절망적이면서도 애절한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마치 날이 잘 선 칼로 심장이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예리한 고통이 함께 동반하는 충격이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 손은 바들바들 떨렸고, 그에 대한 배신감에 호흡은 몹시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마지막 폭발 선언을 들으며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를 잃어야 한다는 상실감에 한동안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감수해야겠다고 굳게 다짐까지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러한 나 역시 그를 사랑하지만, 그래서 그를 떠나 보낸다는 것이 시린 아픔으로 다가 설 것을 알았지만,
그녀만큼 절절하거나 그녀처럼 <그가 아니면 죽음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내 전부를 그와의 사랑에 내걸지는 않았기에,
내 쪽에서 물러서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 사랑에 있어선 지극히 이기적인 나는, 그녀가 말했듯이 그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한다거나,
모른 척 없던 일로 무마시키고 예전의 관계로 돌아간다거나 하는 생각은 티끌만치도 들지 않았다.
또 그녀와 나 사이를 왕래하며 여인들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저울질했던 그를 도저히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전히 그의 마음을 받았던 것이 아니란 것에 대한 실망과
그러한 기미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보이는 사랑에 눈멀었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로, 나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않던 그녀의 전화로 영원히 사랑 하고자 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해 나에게 있어 최고로 운수 좋았던 날이 결국 최악의 날로 탈바꿈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김첨지의 행복이 최고의 비참으로 변질되었듯이 나의 즐거움이 최고의 슬픔으로 변질되던 그날의 일이,
어쩜 그렇게도 소설 속 김첨지와 똑 같은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젠장! 왜 하필이면 그 많은 현진건의 단편중 <운수 좋은 날>을 택해서 읽었을까?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우연찮게도 그와 이별하고 나서 <운수 좋은 날>을 펼쳐들며 했던 생각들이
김첨지의 그것들과 오버랩 되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아..!! 책을 덮고 나서 더 심해진 우울하고 죽을 맛인 지금의 내 귓가엔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죽은 아내에게 처절히 외쳐대던 김첨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운수좋은 날>을 건네 주고,
전화 속 그녀와 함께 멀리 떠나간 그를 향해 외쳐본다.
"이제 내 사랑을 주겠다는데, 왜 받지를 못하고 떠나가니? 왜 떠나가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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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김첨지는 억세게 운수 좋은 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선물 받았던 현실 속의 나는 억세게 운수 좋은 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싶었던 그를 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