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에겐 한가지 낙이 있다. 바로 컴퓨터로 대화를 하는 채팅이다.
동생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배운 후, 영도 재미를 붙이게 되었는데 여간 흥미롭고 신기한 게 아니었다.
영은 자신의 새로운 취미생활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얼굴도 모르면서 자판을 통해 서슴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짜릿하기도 했으며,
언제라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아무 때나 대화를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어서 더없이 좋기만 했다.
동생은 그런 영에게,
"늦게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더니 형을 두고 하는 말인갑네."말하곤 영이 대화를 주고받는 걸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채팅에 깊이 몰입해 있던 영에게 동생이 말했다.
"형은 너무 공격 성향이 강해.
뭐랄까? 대체적으로 형이 쓰는 말들은 호전적인 기질이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
상대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 말들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지 않겠어?."
"뭐가 공격 성향이 강하다는 거야? 봐, 공격적인 건 하나도 없잖아."
영은 동생에게 모니터에 쓰여진 내용을 보여주었다.
"참, 나. 대체 형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길 쓴 거야?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얼굴을 맞대고 대화해도 속일 수 있는 게 인간 아닙니까?
내가 믿을 수 있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뭔가를 보여 봐요」라니.
바로 이런 게 공격적이지 않으면 뭐겠어?"
"난 단지 내 솔직한 생각을 말했을 뿐이야. 어째서 공격적이라는 거냐.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걸 묻지도 못하냐?"
"형, 저 사람도 형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면 안 되는 거야.
형의 이야기들은 대체적으로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그 의미가 틀려질 수가 있는 것들뿐이라고."
영은 동생의 말과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은 단지, 자신이 묻는 질문이나 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진실로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그런 언어들이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했다.
순전히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견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영은 심히 불쾌했다. 영의 동생은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형, 같은 말이라도 우회적으로 돌려서 하도록 해봐.
그러면 상대가 조금은 편하게 형에게 다가서게 될 거야.
봐. 저 사람, 형의 얘기에 웃기만 하고 전혀 대답을 안하고 있잖아."
"컴퓨터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한테서까지 꾸며진 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냐?"
"그게.. 무슨.. 말이야?"
"저들에게까지 내 마음과는 상관없는, 저들이 들어서 좋아해야 할 말만 해야 되는 거냐는 소리다."
"형?"
"내가 채팅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내 뜻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원하는 이들을 스스로 선택해서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야.
너, 자신의 감정을 가장하며 생활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르지?
난 말야,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내 감정에 솔직해 지고 싶다."
"..형.."
"그런데도 넌 사람들이 들어서 좋아할 말만 하라고 하는구나.
내 마음과는 무관한 그런 말들만 하라고 하는구나."
동생은 차갑기 만한 영의 태도에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은 그런 동생의 모습엔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내 기본성향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사람들은 겉으론 웃으면서, 가까운 척 하지만 속으론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거.
나...다.. 안다."
난 과거의 영이 아니니까..
그래서 예전처럼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물론 너에게서조차 환영받지 못 할 존재가 나일 테지."
영은 며칠 전에 있었던 철수와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형? 형의 성격이 뭐가 어떻다고 그런 말을 해?"
"몰라서 묻냐? 겉과 속이 다르잖아. 또 네가 말했듯이 직설적이고 호전적이고.
어찌됐든, 사람들의 눈밖에 나기 쉬운 성격이지.
하지만 또 그게 내 솔직한 심중의 성격이기도 하지."
영의 동생은 갑자기 슬픈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는 건 현실에서 뿐이야.
굳은 얼굴로 내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는 것도 현실에서 뿐이야.
그렇게 내 마음과 표정을 가장하는 것은 다 현실에서 뿐이야.
만약 사이버세상에서 만난 상대가 내 진실의 성격을 받들지 못하겠다면,
나와 상대를 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난 내 진실의 모습을 알아주는 다른 상대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
영의 눈가엔 어느덧 눈물이 아롱이고 있었다.
환영받지 못한 사람의 비참함에 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영은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떨어져 나간 많은 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젠 더 이상 영을 예전처럼 환영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말이다.
물론 거기엔 오랜 지기인 철수도 끼어 있을 터였다.
그들은 세상에 물든 영의 표면적인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터였다.
그러한 생각에 미치자 영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다.
*********
"미안해, 형."
갑작스런 동생의 말에 영은 얼른 눈물을 닦고 동생을 돌아보았다.
"뭐가?"
동생은 따스한 미소를 함박 지으며 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난 형이 너무나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었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의 사람들처럼 변해 가는 형에게서
과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하지만, 아니야. 형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형이란 걸 알았어."
영은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야, 난 과거의 내가 아냐.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 사람일뿐이라고.
네가 그랬었지. 네가 좋아하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내가 된다면 나를 알던 많은 사람들과 너,
모두 내 곁을 떠나더라도 난 아무 말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랬었지"
"네 말 대로였어. 그 이후로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았어.
물론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 내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잃어 버렸어.
결국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거라구!!"
"그렇지 않아, 형."
"그들은 모두 날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어.
그런 시선을 받아 들여야 했던 난 정말 가슴이 아팠지.
환영받지 못한 사람의 비애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어."
"아니야! 그건 형이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들 모두가 다 형을 떠난 건 아니야."
눈가에 아직도 아롱이는 물기를 지우며 영은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형을 알아온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형의 곁을 지켜주고 있을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난 겉과 속이 다른,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걸."
"그렇지 않아. 형을 깊이 들여다보면 알 수 있어.
형은 여전히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고, 바보 같은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야.
형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채팅을 할 때도 여과 없이 드러내곤 했지.
그래서 난 매번 형이 채팅할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란 말야.
예전과 똑 같은 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말야."
"..하지만..철수는.."
"나, 형의 마음 다 알아. 형은 단지 세상에 맞춰 살아가야만 했던 거잖아.
그래야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테니까."
"...그래도.. 철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자신의 마음을 가장할 필요가 있는 거라는 걸 알아.
그래서 나는 그때, 형의 새로운 삶을 강하게 말리지 못했던 거였어.
내가 그렇듯 세상 사람들 모두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야.
그러니 형도 세상에 맞춰 살아가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그랬었구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려 하는 마음을 속이며 살려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
형, 솔직히 그래서 몹시 힘들었지?
형은 여전히 모질지 못하고, 냉정하지 못한 사람이야.
형은 스스로가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형은 단지 너무 지쳐 있어서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을 뿐이라구.
아마 철수형도 형의 변함 없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철수형은 나만큼이나 오랫동안, 형을 지켜봐 온 사람이잖아."
영은 그제야 슬며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그럴까?"
"그래."
"그럼...난 , 더 이상 슬퍼 할 필요가 없는 거네?"
"응.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떤지 몰라도 나와 가족들을 대하는 형은 한결 같았어.
그리고 채팅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솔직하게 대했지. 형은 단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던 거잖아.
그런데 형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을 할 줄은 전혀 몰랐어.
형, 형이 왜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야? 절대 그렇지 않아, 형."
영은 가슴 안에서부터 뭉클한 기운이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난 언제나 그런 바보형이 좋았단 말야!"
"나..그럼...환영받지 못한 사람이 아닌 거야?...그런 거야?"
"바보형아.. 형은 언제나 나에게 환영받는 사람이었다구!
그리고 앞으로도 형이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간에 형을 환영하는 유일의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난 알아. 형의 순수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다는 걸.
다만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이 다칠 정도로 드러내지만 않을 따름이지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또한 그런 형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형 주위엔 많이 넘쳐 날거라는 걸 말야.
아마 지금도 철수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형을 생각하고 있을 걸?"
영은 가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난 형이 정말 좋아. 우리 바보형이라서 정말 좋아!!"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동생의 모습이 정겨웠다.
영은 그런 동생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겉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변하지 않은 자신의 속마음을 보아주었던 동생의 마음에,
그동안 굳게 닫아 놓았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철수도 동생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섰다.
영은 철수를 비롯하여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진실을 깊이 보아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온 마음을 다 열어 보이리라 다짐을 했다.
가장하지 않은 영 본연의 모습을 말이다.
영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더 이상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모처럼 밝고 환한 웃음을 동생에게 맘껏 지어 보일 수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