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을 보고 엉뚱하고 특이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왠지 뚝뚝하고 과묵하여 상대하기 힘든데다가, 뭔가 마음을 움직일 만한 얘기를 들으면
상대가 들어서 좋은 말, 나쁜 말 상관없이 태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내뱉는 그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엔 자신들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어 다시 한번 영이란 사람을 생각해보게 한다고 했다.
그런 영과 몇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처음 만난 사람들조차도), 처음과는 달리 영에게 깊은 호감을 보였다.
그건 모두, 영이 지니고 있는 천성적인 천진함과 솔직함에 깊이 매료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코 지니지 못할 감성과 생각을 지닌 영에게서 마음의 안식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정작 영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은 자신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특별하다 생각지 않았고,
자기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은 사람들이 그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달리,
사람들을 너무 잘 믿어서 항상 배신만 당하는 그의 순진함을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다.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에 자주 상처 입던 영은,
응당 자신의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함 때문에 매번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 입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중엔 영의 순수한 마음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 그의 마음을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도 많았던 탓에 영은 남보다 가슴에 안고 있는 상처가 상당히 크고 깊었다.
솔직히 현실적이지 못하고 약지 못한 영은,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이용해 먹기에는 아주 적격인 성품의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은 매번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그들에 의해 뼈아픈 가슴 아픔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수 차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실망하면서 영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러면서 영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순진함"이 버거운 짐으로 다가서는 걸 느끼게 되었으며,
자신의 그러한 성품을 바보 같다 여기게 된 것이었다.
*********
한번은 전에 있던 직장상사에게 배신을 당한 영이 동생의 어깨에 기대어 꺼이꺼이 울면서 한탄했던 적이 있었다.
"난 이제부터 절대 바보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면서 살거라구.
계속 이렇게 이용만 당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성실히 노력하며 살아도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잖아.
난 이제부터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약게 살 거야. 절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도 내 자신과 내 이익을 챙기면서 살 거야."
그때 동생은 그런 영에게 말했었다.
"형이 그렇게 살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이건 알아 둬야 할거야.
형의 인간미에 이끌려 찾아든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되더라도, 형은 아무 말 할 수 없다는 걸 말야.
물론 약게 현실적으로 살아간다면, 배신을 당할 일도 힘들어 할 일도 없겠지. 그렇지만 대신 형은, 형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될 거야.
그리고 형이 변함과 동시에 어쩌면 나도 형에게 등을 돌려버릴지도 몰라.
더 이상 내가 알고 좋아했던 형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나도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질 테니까."
"그럼 나보고 어떡하란 말야?
맨날 손해만 보고 사람 좋은 모습으로 헤헤거려야 속이 시원하겠어?
난 매번 똑똑하고 계산적이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하기만 하는데,
그래서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프기만 한데, 바보처럼 이렇게 계속 살아가라고?"
"형, 언젠가 형의 착한 마음이 복을 받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런 말 듣자고 하는 얘기 아니야.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고자 할 뿐이야."
"형 같은 사람조차 물질적이고 계산적이기만 한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겠어?
난 늘 형이 손해만 보고, 배신당하는 걸 보는 게 가슴 아팠지..
하지만 말야. 그래도 인간적인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
형은 다른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진실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 형을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르지?"
"...난 그런 내 마음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한없이 물러터지고 의심할 줄 모르는 내 그런 마음들이 정말 싫다.
나..사람들을 믿는 게 너무 힘들어 졌어. 아니..무서워 졌어.."
영은 콧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동생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영의 동생은 그런 영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려 주었다.
"형..울지마... 앞으로 겪게 될 세상은 점점 더 형을 힘들게 할 텐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마음 아파서 울기만 하면 어떡하니?"
"..그러니까 나도 세상사람들과 똑같아 지겠다는 말이야..
나도 내 마음이 아픈 건 싫으니까..."
"형아, 나 세상 사람들이 밉다...
순진하기 만한 형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의 사람들이 밉기만 하다.
사람 좋던 형의 마음에 불신만을 안겨주는 세상이..너무 밉다."
"나는, 바보다. 매번 같은 일을 겪으며 아파하는 것을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바보인가 보다.
하지만 정말이지 내 마음만 깨끗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늘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누가 보아도 당당하고 정의로운 그런 '착한 사람'이 되어 마냥 행복한 삶을 살고자 했지.
그래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마음에 티 하나 없는 성실한 삶을 살아왔단 말야.
그런데 이게 뭐야! 이런 내게 남은 건 결국 쓰라린 상처뿐이잖아!
나..다시는 이렇게..바보처럼 살지 않을래..이젠..정말..싫어.."
"그래..그래..형.
나도 이제는 형이 상처 입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아...세상이 어쩌려고 이러는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부끄럽고 회피해야할 만큼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까지 각박해진 걸까."
"앞으로는 사람들이 내 진심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할거다.
그래서 내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테다.
내가 너무 쉬운 상대였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지.
그러니 이젠 쉬운 사람으로 살지는 않을 테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하지 않을 테다."
영은 동생의 품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동생은 깊이 상처 입은 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안긴 영의 등을 토닥이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줄뿐이었다.
"네 말처럼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다.
너마저 내게서 돌아선다 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더 이상 바보로 살지는 않을 거야.
이제부턴 마음에 없는 말들도 쉽게 할거다.
절대로 내 진실의 마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을 거다."
그때부터 영은 순진하기 만한 자신의 마음을 좀처럼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영의 진실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들어서 좋아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보아서 기분 좋아할 표정을 어느 때나 지을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영은 현실적이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답습하여 쫓아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영은 자연히 자신의 마음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데 아주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외형적으로만 변화되었다고 보여질 뿐,
영의 마음은 예전과 같은 순수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영은 철수의 말에 자신이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으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