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어서 영 일행의 술자리가 파했다.
"철수야, 영이랑 방향이 같지?
영이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네가 좀 집까지 데려다 줘라."
선배는 철수에게 영을 맡기고 나머지 두 명의 친구들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철수는 만취하여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영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영의 양 옆구리에 손을 넣어 힘껏 일으켜 세웠다.
"영, 정신 차려."
"...응.."
"걸을 수 있겠어?"
"...응."
"그래. 그럼 내가 부축해 갈 테니까 잘 걸어 봐. 알았지?"
"...응."
"자식..대답은 꼬박꼬박 잘도 하네.."
"..응.."
"영, 오늘 나 때문에 기분 많이 상했냐?"
철수는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영에게 물어 보았다.
"임마! 넌, 내 마음 하나도 몰라. 알아? 내가 왜 이래야만 하는지 네가 알기나 해?
새끼야, 남들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넌 내 맘 하나도 모르면서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영은 철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영이 주먹을 들어 철수의 배를 강하게 일격 했다.
갑작스런 영의 일격에 배를 움켜진 철수는, 한동안 놀란 눈으로 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새끼야, 네가 그렇게 보면? 네가 날 지금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왜? 너도 날, 치고 싶은 거냐? 그럼 쳐봐. 임마!! 맘껏 쳐보란 말야!!"
"영, 너.. 많이 취했다."
"..흐흐..그래.. 좀..취했지..흐흐..새끼야, 넌 한 10대는 더 맞아야 됐어.
근데, 내 친한 친구니까 한 대로 끝내는 거야. 난 오늘의 네가 정말 싫었거든. 하지만, 넌 내 친구니까 이걸로 끝내는 거다. 알아, 자식아?
새끼.. 아까.. 네 입을 확 막아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런데 네가 한말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니기에..그냥 놔둔 거였어.
아휴~~ 이 웬수 덩어리..자식..같으니라고.."
철수는 술에 취해 주절주절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얘기를 하는 영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그만 싱긋 웃고 말았다.
비틀비틀 제 몸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면서, 꿋꿋하게 자신을 쳐다보며 할말 다하는 영의 모습이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철수는 그런 영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싱긋 웃음을 흘렸다.
"너, 종종 술 좀 먹여야겠다. 이제야 영 너답잖아, 자식아.."
영은 철수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철수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
"철수..너, 나 싫어하지 마라. 나 변했다고 싫어하면 안 돼.
나..너한테서까지 환영받지 못하면 외로워서 싫단..말이야...나, 싫어하지 마..
알겠지?..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넌 그러면..안 돼.."
그 날 철수는 영의 집 앞까지 와서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과 함께 나란히 계단에 앉아 영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밤새도록 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젠장, 대체 기억이 안 난단 말야. 분명 철수의 얘기를 듣고 기분이 상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이 어땠었는지 통 기억에 없단 말이야.
하지만 철수가 나를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어.
전에 나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철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까?'
다시 현실로 돌아온 영은 자기 안에 숨겨진 이상성격으로, 자신은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푸념하기까지 했다.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속마음을 가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그런 모습을 철수 같은 이들은 못 견디게 싫어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된 영, 자신의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으니 어찌된다 해도 크게 상관할 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은 때때로 자신의 속마음과 상반된 생활을 하는 것에 피곤함을 느꼈다.
어느 날인가는 자신이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거침없이 밖으로 툭 터놓는 영 자신의 모습을 아무런 사심 없이 받아 줄 수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도 없다'였다. 영은 그 사실에 몹시 서글퍼졌다.
그 결과는, 결국 영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가장하며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영은 천성이 솔직하여 거짓말을 하지 못했으며, 꾸밈이 없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의 영이 과거의 그와 확연히 다르게 변했다는 얘긴 아니다. 현재도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솔직함과 순수함은 여전히 지니고 있으니까.
다만 과거와 다른 차이점이라고는 과거엔 영이 자신의 그러한 성향을 의식하여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드러냈다는 것이고, 지금은 전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영의 과거사를 잠시 살펴보아야겠다.
현재의 영이 왜 자신을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원인을 따져 봐야 하니까.
*********
좋고, 싫음의 감정이 분명한 과거 영의 천진한 솔직함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대하기 힘들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했다.
또한 그 솔직함으로 인해 '거침없고 직설적이다'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기본적으로 아주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영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이 일반 사람들에게 잘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막상 오랜 기간 영과 사귀어 보면 그가 티 없이 순수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귀어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은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오랜 기간을 두고 본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영을 아주 좋아했다.
영을 잘 아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하나같이 솔직하고 순진한 영의 마음을 부러워하였으며, 그러한 영의 투명한 성품을 소중히 여겼다.
여기서, 영의 직선적인 어투가 남을 비난하거나 멸시하기 위한 수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성의 솔직함에 근거하여,
단지 그 표현하는 것이 직설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뿐이라는 것을 대충은 눈치 챘을 것이다.
몇 안 되는 영의 지인들은, 순수함으로부터 오는 사색에-<어찌 보면 호전적인 성향으로도 보일 수 있는 사색>-신념을 보이는 영의 확고한 마음이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조금 특별하다고 여겼다.
사색과 동시에 천연스럽게 밖으로 불거져 나오는 언어의 표현으로 서슴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영의 자유로운 모습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정말이지 영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다 하여도 다른 이의 호감을 얻기 위해, 뱀의 혀를 날름거리며 듣기에도 좋은 사탕발림의 말들을 너무나 쉽게 입에 담지 않는가 말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좋은 이미지만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가장하며 사는 것이 대중적인 인간들의 모습이지 않는가 말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자신이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 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들어서 귀가 즐거운 숱한 언어가 진정 가슴 안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그 누가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영 뿐이리라!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