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는 그녀
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수근덕거림에는 아랑
곳없이 무심한 얼굴로 빗속을 거닐고 있다.
'편견의 안경을 쓴 채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르고 입만 나불대는 바보들! 멍청
이들! 너희들이 보는 진실이란 것은 다 너희들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모르지! 조금이라도 자기들과 다른 건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오! 저 오만한 무리들!'
비가 오면 당연히 우산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그들이 보는 그녀의 모습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
며,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는 이상 그녀와 같은 행동
을 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이들을 한없이 외롭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역시
나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이해되지도 않는다. 어느 한쪽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
의 손길을 뻗지 않는 이상, 그녀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골은 좀처럼 좁
혀지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후~" 하고 씁쓸한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밖으
로 내뿜어지는 한숨과 함께 속에서는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가슴을 공허하
게 맴돌았다.
"이봐요, 아가씨. 감기 걸리겠어요. 비 맞고 다니지 말고 어서 집으로 들어가
요."
공허한 가슴속을 깊이 파고드는 부드럽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세상이 주입시
킨 편견의 색안경이 쓰여지지 않은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
뜻함이었다.
"쯧쯧. 가엽게도 온통 다 젖었네.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시겠어요."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두근! 두근 울렁였다.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관심을
표명하는 이는 어떤 사람일지 몹시 궁금했다.
"이렇게 계속 비가 오는데.. 우산이라도 쓰면 이 비를 덜 맞을 텐데.."
다시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한층 더 감미롭게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자
기들만의 언어로 속닥이며 무심하게 스쳐 가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
다. 그건 분명 그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고, 관심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항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온통 그녀에 대한 안쓰
러움과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로 우산을 쓰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곤 "생긋~" 맑은 미소를 지
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미소짓던 얼굴을 싸늘히 굳히고 말았
다. 남자가 미소짓는 그녀의 친근한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자가 들고 있던 자신의 우산을 그녀와
함께 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정 남자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슴을 울리는 따뜻한 말에 걸
맞는 행위가 뒤따라 왔어야만 했을 터였다. 가령,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가
까운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 동행한다던가, 들어가라던 그녀의 집까지
택시라도 태워 보낸다던가, 작은 비닐 우산이라도 하나 사서 손에 들려준다던
가, 하다 못 해 그녀가 미소 지어준 순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
을 씌워 준다던가하는 행위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
며, 친근함의 표시로 남자 앞에 한발 다가서는 행위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실체
가 없는 말만 앞세운 채 그녀를 차가운 빗줄기 속에 그대로 세워 두고 있었다.
"정말 기막힌 일이군요."
그녀는 빗물이 뚝뚝 흐르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 절반을 덮어버렸다. 그
녀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절망하여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도록, 얼굴에 반이
가려지게 오른 손을 이마 위에 활짝 펼쳐놓았던 것이었다.
"아저씨! 왜 그런 건대요? 왜 내가 비를 맞고 다니면 안 되는 건대요?"
"그야 젊은 여자가 비를 맞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그렇지요."
그녀는 자신의 눈 주위에서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남자의 모습을 날카롭게 주
시하였다. 원망과 서운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한참을 보았지만, 무심한 듯 그녀
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 눈빛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과년한 아가씨가 사람들 많은 거리에서 비를 맞고 다니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서 아가씨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요? 게다
가 그렇게 많은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아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키워
주신 부모님이 보시면 얼마나 속상해 하시겠어요. 그래서 난 아가씨 부모 같은
심정으로 걱정이 돼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거예요."
멍청이 같은 얼굴을 하고 멀뚱멀뚱 눈을 끔벅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계속해
서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
하고 생뚱맞은 말만 하는 남자의 모습에 급기야는 짜증이 다 났다.
"남이야 비를 맞고 다니든 말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든 말든, 집에 들어가든
말든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거예요?! 왜요?!! 부모
같은 심정이라고요?! 아저씨가 진짜 나의 부모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벌
어졌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을 거예요! 왜 아저씨
는 잘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이다지도 날 슬프게 만드는 거죠?! 왜요? 왜!"
남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그녀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움찔 놀랐다. 그
러나 다시 평온을 되찾고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아가씨가 왜 화를 내는지 난 하나도 모르겠군요. 이런! 쯧쯧 몹시 떨고 있군
요. 비를 맞으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저런저런.. 감기에 걸리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