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끌고 저녁을 사 먹이던 그 친구.
우걱우걱 돈까스를 맛있게 먹던 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그 친구.
'더 맛있는 걸 사줘야 하는데. 어떡하니?'를 연신 말하면서, 거듭거듭 자기 앞
의 고기를 썰어서 내 접시 위에 올려놓던 그 친구.
나는 맛있게 먹는 내 모습에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한시
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목구멍까지 배가 부른대도 그 친구가 주는 고기를
우걱우걱 잘도 받아먹었다.
속은 기름진 고기로 느글느글 요동을 치고 있었건만, 여봐란 듯이 친구가 보는
앞에서 마지막 남은 고기를 푹 찍어 한 입에 털어 넣으며 그 친구를 향해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난 세상에서 제일 배부른 사람의 넉넉한 모습을 하고서 앞으로 다시 만
날 그 친구를 향해 소리 없는 대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있지. 다음엔 내가 너 맛있는 거 사 줄께. 나한테 기회를 줄 거지?'
'그래. 그 날은 네가 오늘 맛있게 먹어줬던 것처럼 나도 아주 맛있게 먹을 거야.'
'그래. 그 날은 네가 오늘 접시에 고기를 올려 놓아준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할거야.'
'그래. 그 날은 네가 오늘 접시를 다 비운 것처럼, 내 배가 터지더라도 다 먹을 거야.''
'그래, 그 날은 네가 오늘 내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던 것처럼 나도 네가 먹는
모습을 기쁘게 지켜볼 거야.'
끝까지 접시를 비울 때까지 내 모습을 지켜보던 그 친구는, 내가 식사를 다 끝
내자마자 자신의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놓았다. 그리곤 뭔가를 뒤적뒤적
찾더니 작은 메모종이를 불쑥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보다는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다 싶어서. 우연히 눈에 띠기에 좋아서 적어
놓고 다녔던 거야."
그 메모종이에는 [좋은 생각은 어려움을 참고 "그러나.."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
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지친 삶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꺼내어 보았을 소중한 글귀를 선뜻 내게 전하는 그 친구의 마음에 나
도 모르게 숙연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머뭇머뭇 메모 지를 받아들고 한동안
그 친구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친구가 어려울 때 힘이 되었을지
도 모를 글귀를 내게 주고 나면, 그 친구는 앞으로 어떻게 견뎌나갈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내 손에 쥐여져 있는 메모 지를 어쩌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내게 '네 마음 다 안다'는 듯이 그 친구가 말했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집어넣어. 난 거기에 적힌 내용 다 외워서 눈감아도 말할
수 있을 정도야."
그 친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을 감고는 말했다.
"좋은 생각은 어려움을 참고 '그러나'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써서 가지고 다니면 되니까 괜찮아."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메모 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너라면 그 글을 가장 잘 이해할거란 생각이 들더라. 언젠가 ..언젠가..말이지..
많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다가오면..그래서..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오면 말이
야..거기에 적힌 글을 떠올려 봐.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너라면 그
글귀를 보고 금새 털고 다시 일어설 것 같아. 아마, 너라면 말이야."
나는 여전히 코끝이 시큰해져서는 재빨리 내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각각 꺼내
들었다. 그리곤 그 친구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
다.
"있지. '어떤 말을 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반드시 미래에 그 일이 이루어진
다'는 아메리칸 인디언 금언이 있어. 이건 내가 생활 신조로 삼는 금언이거든.
네가 나한테 오늘 저녁도 사주고 좋은 글귀도 선물 해주고 너무 고마워서...
적어.. 줄까?"
그 친구는 그런 나를 향해 신뢰와 따듯함이 듬뿍 배인 미소를 한껏 지어 보냈다.
****
그것이 그 친구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로를 향해 티 없이 순수한 미소를 주고받았던,
가슴속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찬 기대로 혼란스러웠던 그때 우리 나이
22살이었다.
이미 세상을 경험한 친구와 세상에 나갈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내가 한자리에 있
었던 그 날. 그 친구와 나는 아직은 불투명하기 만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으
며, 우리들 사이로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 터였다.
그 날 그 친구와 헤어진 이후, 몇 번의 전화통화를 주고받다가 우린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연락을 끊고 말았다. 고교시절 졸업하면서 각자의 길을
덤덤히 걸어갔던 것처럼, 그 친구와 난 또다시 30대가 되기 위한 각자의 길을
차근히 걸어가게 되었다.
난 그때 너무나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그 친구가, 세상 속에 있으면서 깨달아
야 했던 사실들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슴에 지니고 있었을지.
그 상처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는 꿈에로의 진행이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나는 것
이라며 그 친구가 두려워했던 이유를.
그저 그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친 삶을 살아가면서 체념 섞인 절망과
비정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 내가 그 친구가 있었던 세상 속에 고스란히 있고 나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때 전혀 알 수 없었던 그 친구의 고민과 푸념들이, 이제야 가슴으
로 느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세상에게 친구와 같은 상처를 받으
면서 똑같은 고민과 푸념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까지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와의 소중한
기억 때문이었다.
아! 그 친구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냉혹하고 비정한 세상살이의 실체를 접하게 되면, 그 친구보다도 더한 방황과
갈등으로 힘들어할 나라는 걸.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기만 했던, 이상만을 꿈
꾸던 내가 받아야할 상처가 어쩌면 그 친구가 느꼈던 것보다도 더 깊이 박힐 것
이라는 걸.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나의 낙천성과 긍정적인 시선에 먹구
름이 드리워지지 않도록 자신이 직접 체험한 현실의 실체를 얘기해주지 않았
던 것이고, 내내 해맑은 미소로 내 가슴을 채워주었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훗
날 혼란스러울 때마다 내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좋은 생각이란..' 글귀를 주저
없이 내게 건네주었던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난 지금도 꿈꾸는 것이 힘들어질 때면, 그때 내가 친구를 향해 했던 말들을 떠
올리곤 한다. 그리고 친구가 준 메모지속 글귀를 되뇌어 보기도 한다. 또한 후
후! 거리며 미소짓던 그 친구의 모습도 떠올려 본다. 그렇게 언제든 주저앉고
싶어질 때면 말이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딘가에서 30대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꿈꾸고 있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 내 맘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아메리칸 인디언 금언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을 그 친구.
나는 훗날 어딘가에 있을 그 친구에게 물어 보리라.
"친구야, 아직도 사는 게 고민이고 고통스럽니?" 라고 먼 훗날 30대가 된 그 친
구에게 꼭 물어 볼 것이다.
추억 속에 아련히 그려져 있는 그 친구.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그 친구의
평온한 30대를 기다린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친구의 '체념 섞인 절망'에 가슴 쓰
려하지 않을 다가올 나의 30대의 시간을 꿈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