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는 한동안 도봉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시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
다.
"그 크다는 서울도 여기서 보니까 별거 아니다.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아서 뭐
든지 크게만 보이던 것이, 여기선 조그맣게 보이잖아. 우리 살아가는 모습도 그
렇게 보일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저렇게 작은 일부분으로 비춰지겠
지?"
그 친구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진 상황에 고민하곤 하
지. 그 고민의 무게로 우리는 또 얼마나 힘겨워 하니?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아
닌 일인데 말이야. 한 발 물러서서 보면 그저 살아가는데 있어 지나가는 작은
일부일텐데도, 그 순간에는 무슨 대단한 문제라도 만난 것처럼 마냥 심각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곤 하잖아. 마치 우리들의 삶이 그 순간에 결정될 것처럼 말이
야."
그 친구는 한동안 묵묵히 도봉산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우리들 사이
로 깊은 침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난 말이야. 빨리 30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깊은 침묵의 벽을 깨고 들려온 그 친구의 말에 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힐끗 나를 보던 친구는 또 한번 피식 웃어 보였다.
"그냥 30대가 되면 뭐가 되든지 되어 있을 거 아냐. 그러면 '무엇을 하며 살아
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나를 보면서 괴로워
하지 않아도 되지. 숱하게 다가오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어렵게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지. 얼마나 좋니?"
"그런데 왜 하필 30대야?"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고,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이미 확고히 정립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지
닐 나이대가 30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의욕만 앞서고 충동적인, 또 너무나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20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안정돼있고 준비가 되 있어서
앞을 향해 정진만 하면 되는 나이잖아."
"뭐??"
"생각해봐. 그때가 되면 너와 나, 뭐가 되도 되어 있을 것이고, 그 위치를 고수
하고 있을 거 아니니? 그 자리는 지금의 우리 모습처럼 위태위태한 것이 아니
라, 확실히 자리 매김하고 있는 모습일 거란 말이야. 자기의 자리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뭐하고 사나' 생각하고 고민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라면 좋지 않겠어?"
"정말 너, 지금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훌쩍 30대가 되기라도 했으면 한다는 말이
니?"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난..내 맘 같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게 고민이고 고통스럽거든. 지금은 없고, 그냥 30대로 살아갔으면 좋겠어. 재미
있을 것 같지 않니? 후후후-"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에선 힘들어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전
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친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한 표정과 행
동으로 후후!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친구는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마음을 교묘히 가장하며 감추고 있었다. 언
뜻 보면 장난처럼 쉽게 넘겨버리기 십상일 모습으로 세상에 깊이 상처입고 지
쳐있는 자신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 친구는 내게 들킬세라 아무런 감
정도 실려있지 않은 어조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밝은 모습으로, 자신
의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난 그 친구의 그런 태연함이 더욱더 애처롭게 느껴졌
다. 극도로 태연한 모습으로 가장하여도 매번 내게 들켜버리고 마는 친구의 마
음. 난 그런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과장된 몸짓 속에 슬픔을 감추고 삶을 살
아가는 삐에로를 그리고 있었다.
"있지. 나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뭐가 되지?' 그런 걱정 많이 해. 그렇지
만 너처럼 빨리 30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네 말처럼 30대가 되면, 확
연히 정해진 자기의 자리를 지니고는 있겠지. "
나의 말에 그 친구는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리가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 안
해.
지금 단계에서 뭔가를 이루어놓지 않으면 30대가 되어도 똑 같은 모습으로 있
을 건 뻔할 테니까."
그 친구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 넌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역시나 가슴속까지 따듯해져오는 미소를 한껏 품고 있었
다.
"과정 없는 결과는 아무 의미 없어. 설령 그 결과가 호화찬란하다 해도 속 빈 수
수대와 다름없는 거야. 지금의 단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거치고 지나야 할
삶이지. 난, 네가 좀더 강하게 지금의 삶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었
던 일을 찾아서 노력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어."
"너 말이야. 온통 혼란투성이인 마음을 가져본 적 없지?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막혀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어 본 적 없지?
이리저리 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려본 적 없지?
장래를 내다보는 것이 고통스럽고 괴로워 본 적 없지?
그래서, 지금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본 적 없지?"
난 친구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웃음기 머문 그 친구의 온화한 표
정에, 나를 향한 그 친구의 질문에 할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게 한
없이 부드러운 친구의 모습에서 처음부터 나의 대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질문
이었음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친구는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게로 향한 질문들은 그 친구
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며, 훌쩍 30대가 되어서라도 불안하기
만한 지금의 시기를 잊고 싶은 게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 친구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고교시절,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
어. 그때에 명백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선 오히려 더 희미하기만 한 걸.
점점 내 자신을 잃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뭐라도 하나 확실한 게 없다는 것
이 날 꿈꿀 수 없게 해...
정말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을 사는 게 고통이고 고민이다.
휴~~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도 벅찬 세상인데,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서야 뭘
할 수 있을지.. "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마! 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질이 있
어. 왜 찾으려 하지 않는 거니? 넌 지금까지 네 꿈을 위해 뭔가를 시도해 보려
노력하지도 않았잖아."
그 친구는 몹시 놀란 모습으로 멍하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네 스스로가 그 꿈들로부터 멀어지도록 담을 쌓았던 것을 왜 모르니?
그러면서 왜 자꾸 '안 된다'고만 생각하려 하는 거니?"
나는 그 친구를 향해 굳은 결의의 눈빛을 빛내며 단호히 말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아. 아직 늦지 않았어. 너와 나, 아직도 꿈꿀 수 있단 말
이야."
곧 본연의 모습을 찾은 그 친구는 그저 후후!!거리며 웃기만 했다.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마냥 웃고 있는 그 친구에게서 나는 알 수 없는 서글픔
을 느꼈다.
고교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그 초연함 뒤에 숨겨진 '체념 섞인 절망'을 결
국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 친구는 절절한
심정으로 토로하는 내 말들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듣고만 있었다.
"네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은 유독 너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거야. 어차피 지
금의 단계에서 넘어야할 벽이라면, 당당히 맞서야지 않겠어? 체념과 포기가 아
니라 패기와 오기로라도 일어서야 하는 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모르겠으면, 뭐가 뭔지 모르겠으면 알게 될 때까지 찾기라도 해야지. 우리들 앞
에 주어진 시간,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우리에겐 부딪혀 겪어야할 일
들이 앞으로도 많이 남아있을 텐데, 여기서 포기하고 주저 않을 수는 없잖아.
아직은 더 살아봐야지. 아직은 더 겪어봐야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봐야지.
다른 건 몰라도 우리들에겐 그럴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으니까. 안 그
래? "
난 절박하기 그지없는 그 친구의 상처 난 마음에 조금이라도 내 메아리를 울리
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자신 스스로를 힘든 나락 속으로 떨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길
바랬다. 또한 체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길 바랬다.
"봐! 이렇게 높은데서 보는 서울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빽빽한 건물과 사람들
로 넘쳐나던 수도 서울의 위상도 별거 없잖아! 우리네 사는 인생도 이와 다를
게 뭐 있겠어?
언젠가 우리가 정상에서 우리 삶을 되돌아 봤을 때를 생각해 봐. 지금의 혼란스
럽고 괴로운 시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저 젊어서 꼭
거쳐가야 할 통과 의례려니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 지금 많이 힘들어
도 자신 없다느니, 3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느니, 꿈꾸지 못한다느니 하는 그런
마음 약한 소리하지마. 너, 하고 싶었던 거, 배우고 싶었던 거, 지금 다 해 보란
말야. 겁내지 말고 움츠리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보란 말야. 너의 숨겨
진 재능을 네 속에 묶어 두려 하지 마. 넌, 모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사는 게
고통이고 고민이다'라는 말, 아직은 아니야. 뭐든 노력을 다 해보고 나서 그래
도 '안 된다' 싶을 때, 그때 다시 말해. 그럼 내가 인정할 테니까."
난 이쯤에서 내 말을 부정하는 그 친구의 장광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극히 논
리적이면서도 냉소적인 그 친구의 독특한 설법이 펼쳐질 것임을 예상하며 긴장
을 늦추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잔뜩 긴장해 있던 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 친
구는 곧 태연스레 기지개를 펴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배고프지 않니?"
말을 하곤 그 친구는 혼자 산 아래로 성큼 성큼 발을 내딛었다.
순간 당황한 나는 그 친구의 뒷모습에 대고 "XX야!!! XX야!!!" 그 친구의 이름
을 소리쳐 불러댔다.
그러자 한참을 내려가던 그 친구가 나를 돌아보더니 아주 환하게 웃으면서 어
서 빨리 내려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