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장소에서 만난 그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도봉산 입구로 향했
다. 도봉산 입구까지 다다를 때쯤, 그 친구가 대뜸 나의 손을 잡아채더니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게 오르면 힘드니까 '마루바위'까지만 가자. 괜찮지?" 하
며 도착지를 정했다. 처음엔 갑작스런 그 애의 행동에 얼떨떨했지만, 나는 곧
웃음을 함박 지으며 그 애의 제안에 찬성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어쨌든 오르라고 있는 산이니 목표지가 정해진다면야 가는
데 훨씬 수월하겠지."
"후후. 크든 작든 목표를 정해놓고 뭔가를 시작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말하며 '마루바위'를 향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그 친
구의 발걸음은 몹시도 가벼워 보였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여유로움과 넉넉함
은 여전했다.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친구가 언제고 그 모습으로 있어줄
것만 같은 믿음이랄까. 그런 마음이 다시금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하나도 안 변했어. 정말 그대로야."라는 내 말에 그 친구가 말했다.
"있잖아, 60먹은 할머니들도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그런대. '넌 어쩜
예전 모습 그대로니? 하나도 안 변했어.'하고 말이야. '그런 소리 마라, 얘. 세
월이 흘렀는데.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많이 늙었지?' 그러면 '아니야, 아니야.
전혀 안 늙었어. 예전모습 그대론데 뭐.' '어머! 그러니? 호호. 너도 그대로야.'
웃기지 않니? 꼭 우리가 60먹은 할머니가 되어 다시 만난 사람들 같잖아."
그 친구는 자기가 얘기를 하면서도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연신 껄껄 웃어댔다.
힘들게 "마루바위"에 도착한 우리들은 바위 위에 바로 등을 대고 누웠다.
"며칠 전에 말이야. 나, 여행 다녀왔다. 바다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무작정 가야한다는 일념 하에 가방하나 둘러메고 그렇게 다녀왔지."
그 친구는 불쑥 여행을 다녀왔다는 자신의 얘기를 덤덤한 어조로 내게 꺼내 놓
았다.
"여행? 바다? 누구랑 갔는데?"
친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누구랑 갔는데? 갑자기 여행은 왜?"
"누구는 뭐. 그냥, 답답해서 나 혼자 다녀왔어."
"뭐????!!!!!! 너,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랬니?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서 그랬니?"
그 친구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라고 혼자 여행 못 가라는 법은 없어. 남자는 되는 것을 여자는 왜 못한다
는 거지? 남자는 되는데 내가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하겠는
데 여자라고 혼자서 여행 못 갈 이유는 없어."
"그건 나도 알아. 난 지금 너의 무모함을 두고 말하는 거야. 여자, 남자 그거 따
지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란 걸 네가 더 잘 알잖아. 여자든 남자든 혼자서 여행
을 한다는 건 위험한 거야. 그만큼 많은 위험요소와 상황에 쉽게 노출되어 있으
니까 말야.. 그러니까 여행을 할 땐 항상 그런 상황을 감수할 마음가짐을 가지
고 있어야 하는 거라구. 너처럼 충동적으로 선택해서 갈 여행은 더더군다나 되
어선 안 되는 거라고 봐. 준비가 된 여행이었어도 몇 번을 고려했어야 할 상황
이었을 텐데..넌, 겁도 안 났단 말이니?"
"후후. 그런 틀에 박힌 말은 집어치워. 이것저것 따져 생각하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생각만 죽어라고 해봐. 결과는 '안 된다'밖에 더 나오겠어?"
"..너..?"
"물론, 처음엔 겁이 나긴 했어. 나 역시 너처럼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니까."
"........"
"나라고 무턱대고 '가야지' 하고 떠났겠니? 나도 처음 떠나는 여행인데 무섭지
않았겠어? 정말이지 많이 두려웠어. 그렇지만 혼자 떠난다는 두려움보다 바다
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거든. 그리고 나를 옭아매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
나고 싶었어. 아니, 그런 생각을 깨뜨리고 싶었어. 그걸 깨지 않으면 영영 혼자
서 여행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못할 테니까."
"........."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싶었던 거야. 혼자서 여행조차 할
수 없다면, 앞으로 혼자서 해야 할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할수 있겠어? 기껏 혼
자 여행가는 것도 두려워 벌벌 떨면서 말야.
그런 내 생각을 뒤집어엎기 위해서라도 난 가야만 했던 거야.
걱정꾸러기야, 이제 알겠어?"
역시나 그 친구다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놓았다. 그런 그 친구에게선 시
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초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친구가 갖고 있는 초연함에 마냥 여유자적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
는 없었다. 너무나 고요하고 천연덕스런 초연함 뒤에 감추어진 "체념 섞인 절
망"을 또다시 느껴버리는 건 아닐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고교시절, 대학을 포기하면서 보여주었던 모습처럼 한없이 여유로운 그 애의
모습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불안한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친구는 주저리주저리 -(정작, 내가 알고 싶어하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단편적으로 꺼내놓을 뿐이었다.
"바다보고 청량리역에 도착한때가 이른 새벽녘이 다 되어서였어. 전철도 다니
지 않는 이른 새벽. '모두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역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이 들
까? 아마도 세상은 어둠에 깊이 묻혀 고요한 적막만 흐를지도 몰라.' 생각하면
서 기차에 몸을 실었었지. 그런데 막상 역에 도착하고 보니까, 내 생각이 틀렸
다는 걸 알게 되었어.
역 주변엔 여행객들과 노숙자들로 복작복작 대고 있었거든. 내가 떠나올 때의
정경과 별반 차이가 없더란 말이야. 내 예상대로 역 주변이 고요했다면, 적어
도 처음에 가졌던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느꼈을 지도 몰라. 아무것도 보
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있다는 생각은 두려움에 떨게 하기엔 충분하니까. 그
런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그런 두려움은 아예 들지도 않았지.
나는 전철이 올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어. 그래서 시계탑 주위에 자리를 잡고 기
다렸지. 그런데 노숙자 중에 하나가 나에게 집적거리는 거야. '아가씨, 혼자
야?' 끈질기게 추근대는 통에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지. 그때 처음 '이래서 여
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구나'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집적
거림의 대상은 되지 않았을 테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나 혼자 그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다 캄캄했었어. 후후! 나중엔 말야. 짜증이 다 나더라구. 어쨌든 결국, 난 그 사
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전철이 오기를 기다렸어."
그 친구는 마치 남 이야기하듯 무덤덤하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 이야기 속의 친구인 듯 놀란 토끼눈을 하고 듣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 친구는 피식 한번 웃고는, "그렇게 놀랄 건 없어.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야."라고 말했다.
"혼자 하는 여행 나름대로 할 만 했어. 아니 아주 좋았어. 네가 생각하는 것처
럼 위험스럽지 않았어. 돌아오는 길에 좋지 않은 일이 잠시 있었다 뿐이지, 내
가 한 여행은 대체로 순탄했거든. 뭔가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해 주었지. 그러니
까 혼자 하는 여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어.
여행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마련이
야. 그렇다고 마냥 벌벌 떨며 움츠리고 있어야 할까? 난 그렇게는 못해. 나에
겐 안 통하는 말일 뿐이야. 물론 여행을 함에 있어 사전에 마음가짐을 다지고,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네 말을 인정하기는 해. 우리네 인생도 네 말마따나
미리 준비하고 마음을 다지면 훨씬 수월하게 살수 있을 테니까 말야."
"치..기집애...너다운 말이다. 그리고 너다운 행동이었구."
그 친구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임마, 그거 내가 너한테 자주 써먹던 말이잖
아. 허락도 없이 그렇게 차용해도 되는 거야? 후후후."
후후!거리며 환하게 웃는 그 친구의 모습에 내 가슴은 모처럼 따듯한 온기로 가
득 메워졌다. 그것도 잠시, 역시나 친구의 초연함 뒤에 숨겨진 그늘이 못내 가
슴 한켠을 아리게 했다.
그 친구의 마음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이유로 친구
는 바다를 찾아 홀홀 단신 기차여행을 떠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른
새벽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 친구는 내 의문에 대한 그 어떤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내 머릿속을 채
우고 있는 숱한 물음들을 가슴에 지닌 채 나는 그 친구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
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직접 물어보는 것이 내 호기심을 채울 가장 좋
은 방법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난 묻지 않았다.
내 물음은 그 친구가 몹시 피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자존심
이 강한 그 친구에겐 말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를 테니까. 또한 내 물음으로 인해 그 친구는 몹시 상심할지도 모를 테
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내가 물으면 친구는 꾸역꾸역 다 얘기해 주리라는 걸 알면서
도 묻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그 친구 스스로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기다려도 그 친구는 끝내 말해 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
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는 것은, 언제가 되더라도 그 친구가 그 날의 일을 얘기해
줄 때가 올 거라는 것 또한 알기 때문이었다. 확연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기다림의 시작을 예감하며, 나의 궁금증은 그렇게 가슴깊이 묻히게 되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