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보고 싶은 한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 있어 몇 되지 않는 특별했던
친구들 중에 하나였던 그 친구. 그 애는 자존심 강했고, 숨겨진 고민도 많았던
친구였다. 그래서 조금은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친구
이기도 했다. 난 왠지 그렇게 남과 다른 그 애의 독특한 시선과 특별함이 마음
에 들었다. 또한 내가 지니고 있는 감성과 다른 감성을 지닌 이가 있다는 것에
묘한 이끌림의 감정을 느꼈다. 아무튼, 결국 나는 그런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
그 친구를 아주 좋아했으며 자연스레 친분을 맺게 되었다.
나는 항상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애가 지니고 있는 비관적이고 냉
소적인 생각을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면 또 그 친구는 '그건 아니지..'하며 나
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면서도 감상적인 생각을 바꾸고 싶어했다. 이렇듯 서
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으로 우리들은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정말이
지 공통점이라고는,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빼고는 눈
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그런 친구였다. 그렇게 모든지 나와는 반대되
는 말만 골라하고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품고 있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친
구와 나는 상당히 사이좋게 지냈다.
한창 입시에 찌들어 다른 건 돌아볼 여력조차 없었던 고3 수험생 시절. 그 당
시 나는 갑자기 무섭게 공부만 하는 반 친구들의 모습에 상심했었고 입시라는
압박감에 늘 답답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꿈으로 가득 차 있지만 꿈꾸지 못
하는 현실에 몹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내 답답한 마음에 숨을 트여 줄 유
일의 탈출구가 있었으니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짝꿍이 되어 전보다
깊게, 허나 대학과는 무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곤 했다. 그런 친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이상하게도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하던 내 마음에 깊은 평
온함을 느끼곤 했다.
그 친구는 너무나 초연히 신들린 듯 공부만 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반기를 드는
듯 소설이나 산문을 읽으며 그 내용을 매번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어
떨 땐 자신이 읽었던 책 중 감명 깊거나, 내용이 마음에 흡족했을 시 '읽어봐.
아주 괜찮아' 하며 내게 툭 던져주었다. 그리곤 며칠 뒤 어김없이 '넌, 이 얘길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생각이 궁금해.'라고 책에 대한 내 의견과 감상을 물어왔
다. 그렇게 물어 오는 그 친구는 내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는 데엔 전혀 미안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에 가득 한 모습으로 눈빛을 빛내며 집요하
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자신이 수험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사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러하리라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난 그런 그 친구의 모습을 한동안 주시하다가 그만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보던 자습서나 문제집, 정석 등을 덮어두고 차근히 내 생각
을 얘기 해 주었다. 가만히 내 생각을 다 듣고 난 뒤, 그 친구는 내 생각에 반하
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넌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어. 다르게 한번 생각해보라구.'를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경쟁의 열기로 후끈
거리는 자율학습시간, 우리는 둘만의 뜨거운 논쟁에 돌입하곤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렇듯 대학을 가기 위
해 공부하는 시간보다도 그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 더 많았던
고3 수험생 시절이었다. 그 시절, 주입식으로 내키지도 않는 지식을 머리 속에
처박는 꼴을 하고 공부하는 기계처럼 무감각하게 사느니 차라리 친구가 제시하
는 여러 가지의 책을 보면서 같이 토론을 하고, 그렇게 나만의 가치관, 인생관
을 확고히 세우는 게 백번은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틀에 짜여있지 않은 자유스러운 생각, 초조함 없는 여유로움, 꼬일 대로 꼬인
냉소적인 시야, 모든 초연함 뒤에 숨겨져 있는 체념 섞인 절망. 그 친구를 떠올
리게 되면 자연히 튀어나오는 말들이었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친구에게 한가
지 아쉬웠던 점은 바로 그 '체념 섞인 절망'을 보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미
처음부터 대학을 포기하고 있었고 포기와 체념에서 나오는 여유 자적함과 초연
함으로 다른 친구들이나 나처럼 공부에 매달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충분히 꿈
꿀 수 있는 젊음과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그 친구는 실패한 사람처럼 자포자기
상태에서 삶을 비관하며 차가운 시선을 세상에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 그 친구는 겉으론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진심을 어
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독특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말
속에 교묘히 '체념 섞인 절망'을 숨기고 비장하게 얘기하곤 했으니까. 또한 주
의 깊게 듣지 않으면 무심히 흘러 넘길 수 있을 만큼 너무나 섬세하고 그럴듯하
게 가장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