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가을 날, 하늘의 구름이 흐르고 있다.
바람 따라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빨간 벽돌집 옥상의 펜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바람 따라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다.
옥상 위에 텅빈 빨랫줄은 흔들리고 있다.
바람 따라 좌우로 출렁출렁 흔들리고 있다.
그 무엇도 멈추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도 저 빨간 벽돌집 옥상 위에 있으면 멈추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흐를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 새벽,
빨간 벽돌집 옥상은 아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건물 옥상 위에
한동안 올라 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때도 지금처럼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건물 옥상 위 -(시멘트로 지어진 사각의 부속 건물 위로 솟아있는)- 안테나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새벽이었다면 더 좋았을 걸... >
그러나 서울은 어디를 가든 <칠흑같이 어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늦은 밤 시간이나 이른 새벽시간이라 하더라도
인공의 빛으로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은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도 더 밝기만 하다.
아무튼 나는 ,
<칠흑같이 어둔>은 아니지만 얼굴표정을 감출 수 있는 어둠과
무슨 짓을 벌여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인적이 존재하지 않는
예의 그 안테나가 세워져 있던)-그 곳에 혼자 있을 수 있었다.
이른 저녁시간부터 마신 몇 병의 소주로,
이미 적당하게 취기가 올라 감정도 격해진 상태였고,
마침 바람도 강하게 불어와 멈추지 않고 홀로 흔들거리고 있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작 그렇게 한없이 흔들거리면서 무엇을 했던가..?
나는 편하게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적당히 인공의 빛이 스며있는 기묘한 어둠에 침식당한 채로
흔들흔들 몸을 까딱이며 아주아주-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평소에 소리 없이 곧잘 눈물 흘리던 나에게서 탈피하여
세상에서 제일 크고 우렁찬 목청으로 울고 또 울었다.
두꺼비 눈이 되도록.. 목이 쉬어 터지도록..
그리고 별조차 뜨지 않은 검은 하늘을 향해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서
중얼중얼~ 끊임없이 주절였다.
<엉-엉- !!주절 주절~~ !!엉-엉- !!주절주절~!!>
그런 내 울음 소리와 중얼거리는 이야기 소리는
온 동네를 넘나들 만큼 컸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강하게 불어 오는 바람 소리에 묻혀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더욱 크게 울었고, 더욱 소리쳐 이야기 했다.
<...이래서는...>
<..왜 나에게..>
<..슬픔이..>
<..아파..>
<..앞으로..>
<..멈추고싶지..>
이러한 단어들이 날이 밝은 지금,
점멸하는 별처럼 내 마음 안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한다..
깜빡 떠올랐다 깜빡 사라지는 이 단어들은
바람이 차마 다 가져가지 못한 내 기억의 잔재이다.
차가운 손이나마 세차게 뻗어
오늘 새벽 내내, 얼굴에 머물렀던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바람이
차마 다 가져가지 못해 남겨 둔 기억의 잔재이다.
온 몸이 꽁꽁 얼어 붙을 만큼 그렇게 강하게 불어오더니..
그렇게 시린 차가움으로 가슴속까지 깊이 파고들더니..
정말이지 건너편 집 펜이 저렇게 빨리 돌아가는 것처럼
너무나 빠르고 세차게 내 온 몸을 향해 불어대던 바람이었는데...
깊은 새벽녘,
한동안 나의 정체 모를 행방불명으로 쓰린 가슴 훑어 내렸던 이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서 내게 물어 왔다.
<너,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있었던 거야?
<br/>집에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던 애가 몇시간이 되도록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혹시라도 잘 못된 줄 알고 놀랐다고.
대체 네가 없던 그 몇시간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있었던 거니?>
나는 장난스런 웃음을 한껏 짓고선 쾌활하고 씩씩한 어조로 말했다.
<바람에 맹세를 걸고 한치의 거짓도 없이 명쾌하게 말해 주지.
<br/>난 말야. 내가 살고 있는 이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앉아,
가장 이른 새벽 시간에 찾아 든 세찬 바람을 맞으며,
칠흑같이 어둔이 될 순 없지만,
그럼에도 가장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던 서울 하늘을 향해,
가장 크고 절절한 언어로 바람과 함께
아주 슬프고도 가슴 아픈 길고 기-ㄴ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들은 나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턱이 빠져라 입을 딱 벌리고선, 그 새벽에 있었던 일을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말하는, 나를 한동안 주시했다.
그리곤 마침내 무언가 내게서 찾아내기라도 한 듯
벌어졌던 턱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며
그들 스스로 결론 지어 버린 말을 내 뱉었다.
<네가 아직 술이 덜 깬 것이 틀림없어.
<br/>흔적이 묘연한 네 행적에 대한 이유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에구! 문제아에 골칫 덩어리 같은 녀석! 너 정말 징글징글 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비밀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특유의 깊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실은 바람만이 알고 있다. 그 무엇도 멈추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게 하는 바람만이..
바로 지금까지도 빨간 벽돌집 옥상위 펜을 돌게하는
저 바람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