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차구나. 얼마나 헤매고 다녔으면 이렇게 꽁꽁 얼었을까.』
유달리 따뜻한 손을 지니고 있는 지영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내 손을
<오물락-오물락-> 주무르며 꺼낸 말이었다.
『손 많이 시리지?』
『바보.. 이깟 손 하나 차가운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못 견디겠는 건,
지독한 외로움으로 마음 시린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거지. 젠장! 넌 뭐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니?』
나는 심퉁 맞게 대꾸했다. 그리고 마치 날 이해 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한 지영의 말에 마음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느
꼈다.
지영만은 알아 줄거라 믿었는데, 아니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손이 차다니 어
쩌니 하는 말을 주절이다니. 나는 그런 지영에게 실망하였다. 결국 지영이나 다
른 친구들이나 내 기대를 채워주기엔 역부족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나를 드러
내려 애를 써봐도, 아무리 귀에 대고 말을 해봐도 보아주지 않고, 들어 주지 않
았다. 알아주지 않았다.
『지영이, 넌 누군가와 깊이 관계한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라는 거 알고 있
니? 타인이었을 때보다 더 관심 가져야 하고, 정성도 많이 쏟아야 하고. 세상
에 그렇게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도 없어.』
『그러니? 그럼, 넌 왜 그런 관계라는 것을 맺고 귀찮은 관심과 정성을 쏟는 거니?』
『그야 나는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인간이고, 또 내가 했던
대로 그들에게서도 지극한 관심과 정성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역시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귀찮은 일이야.』
지영인 <쿡쿡> 소리내어 웃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곤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넌 네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귀찮다고 할 만큼 신경 쓰며, 네 안의 정성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마.』
『날 힘들게 하는 건!! 마음에도 없으면서 하는 내 말 따위가 아니라,
또 네가 말하는 그런 사실이 아니라,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나의 눈시울이 점차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을 주지 않는 건데.
정이란 것이 무서운 게 이미 깊이 들어와 버리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거야.』
예전의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그 누구에게라도 정을 주는 것이 싫어 마음의 벽
을 높이 쌓아 올리곤 했다. 그 때의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정을 준다는 건 내 마
음 한쪽을 떼어 준다는 것이고, 그렇게 소중한 내 마음을 떼어 낸다는 것은 생
살을 떼어내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러니 나는 무턱대고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떼어 준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래서 난 그 누구에게라도 정을 주는 것이 싫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내 마음을 떼어내는 아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나 혼자서는 살수가 없는 인간이었기에 말이다.
여하튼 나는, 매번 마음과 달리 사람들에게 쉽게 정을 주었다. 물론 정을 주었
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너무나 소중한 지영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
런 지영을 잊고 다른 이를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영에게조차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또 다른 이들에게는 드러낼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럴 때면,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미처 지영에게로 가지 못한 정
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속절없이 사람들과 정을 주고받으면)- 나
라는 인간은 어김없이 그들 속에서 외로움을 깊이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있는데,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속에서 더욱 외로워진다는 절대 불
변의 사실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 때,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외로움으
로 슬퍼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생각
이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나 하나 상처 입지 않겠다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벽을 치고 있겠다는 발상 자체가 엉뚱하고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주어도 느껴지는 외로움인데, 주지 않고 느껴야
할 외로움은 오죽이나 더 할까 싶었다.
『넌 참 생각이 많아. 그 생각, 반만이라도 함께 나누면 참 좋겠다는 생각 많
이 했었는데. 넌 잘 이야기해 주지 않더구나.』
지영이 어느 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곤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눈망울을 반짝이는 지영에게 씁쓸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가슴이 아파.. 처음 정붙이며 사는 것도 어렵
지만,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고, 떼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대로, 생각이나 감정을 조절하며 사람들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가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라는 탄식의 말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영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곧 포기하고는 처
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