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빛을 발하는 별의 물결이 출렁이던, 어느 늦은 12월의 겨울밤.
나는 술이 만취하여 10년 지기(知己)인 지영을 찾아갔다.
지영은 생각지도 않은 나의 출현에 놀랐는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나를 맞아 들였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술을 많이 마신 거야?』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실려있는 지영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아득하니 차가운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송년모임이 있었어.
그 모임이 파하고 돌아오는데 괜스레 마음이 허하고, 아프더라.
그런데 달리 갈 데가 있어야지.
이런 상태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어.
그러다 문득 네가 생각이 났어.』
지영이 잘 왔다는 듯 나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있잖아.
아무도 묻지 않았어. 아무도 보지 않았어.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어.
네게로 오는 동안에도 아무도 없이 난 혼자였어.』
내가 말을 하는 중에도 알싸하게 넘어오는 소주 향이, <풀풀풀-> 지영의 고운
얼굴을 향해 뿜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영은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염려가 가득 담긴 시선을 하고서, 축 늘어진
버드나무가지처럼 흐늘거리는 나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도, 마음이 텅 비어 무게 없이 비틀거려도
아무도 잡아 주지 않았어. 그래도 난 꿋꿋이 혼자서 여기까지 왔어.
혼자서 여기까지.』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지영은 자신의 가늘고 긴 하얀 두 손에 깊은 무게를 실어, 잡고 있는 나의 손
을 더욱 세게 거머쥐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주 잡은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아주 강하게.
『넌, 함께 손을 마주 잡는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
나는 무기력해진 손을 지영에게 맡겨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청하니 흐릿해진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영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감싸인 내 손을 그녀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다 놓았다.
<콩콩콩>. 지영의 심장박동 소리가 내 손에 전해져왔다. 몇분여의 시간이 지
난 뒤, 지영은 자신의 손을 나의 왼쪽 가슴 위로 옮겨놓았다. 이번엔 <둥둥둥>
하는 내 심장 박동소리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거쳐 나의 손으로 전해져왔
다. 그때, 지영은 뚫어져라 내 눈을 주시하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지영은 내 가슴에 두었던 손을 그녀의 무릎위로 얌전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함께 손을 마주 잡는다는 것에는,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 맡긴다
는 뜻이 숨겨져 있어. 방금 내 심장과 네 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린 함께
마주잡은 손으로 꼭 같이 느꼈어.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우리,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마음은 하나야. 내 마음은 네 것이고, 네 마음은 내 것이
지.』
나는 지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여 보였다.
『그럼, 이야기 해 주겠니? 우리의 마음을 힘들고 아프게 한 오늘, 우리에게
서 일어났던 일을 다시 한번 들려주겠니?』하는 지영의 말에 나는 그 날의 일
을 찬찬히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기분 좋게 외출을 했던 처음과 달리 왜
가슴 아릿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는지, 왜 그토록 쓴 소주를 정신 없이 들이 켰
는지, 왜 지영이 앞에서 투정 섞인 푸념을 내뱉었는지.
******
나는 결국 그 모든 이유가, 그 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느꼈던 내 감정 때문이
라는 결론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감정에서 기인한 슬픔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홀로 고립되어 살 수 있는 사
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이들과 복잡다단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사람
들과 관계하면서, 개인은 어떤 특별한 의미와 배움을 익히게 된다. 사람은 혼자
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기도 하고, 관계로 인해 파
생되는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 역시 25년 동안의 짧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사람들과의 숱한 만남과 헤어짐
을 반복하며 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외로움>이란 감정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아마 인간에 대해 회의(懷疑)라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
던 것도, 그 <외로움>이란 감정을 알게 되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만약 중간
에 지영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까지도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
(懷疑)로 괴로워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가장 인
간적인 지영을 만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그때까지 줄곧 내 의식을 따라 다니
며 고통을 주었던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품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깊이 관
계하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함께 하면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바로, 그
것이었다. 또 그 감정은 지영이 외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하면서, 더욱 빈
번히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치 그 날, 친구들과의 송년 모임에서 내내 내가 느
꼈던 것처럼.
『너,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래, 이야기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나 계속 이렇게 네 손잡고 있어도 되는 거지?』
그동안의 생각들 사이로 고요히 찾아 든 지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도 그녀가 궁금해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지영에게는 특별히 숨길 것도 없었다. 지영일 찾아갔단 사실 자체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 받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좀처럼 내 깊은 속내를 밝힐 수
가 없었다.
『네 마음 조금이라도 더 느껴볼 수 있도록, 이렇게 계속 네 손을 잡고 싶어.』
순간, 나는 지영의 말에 어쩌면 나의 속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영인
다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나의 10년 지기(知己)인
지영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어떤 문제가 지영에게
향하게 했는지. 내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10년이 넘게 나를 지켜 본
지영이라면, 내가 보이는 표정이나 잠시 흘렸던 말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도
있겠거려니 생각했다.
..(2)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