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 언제나 직선적이고 호전적인 어투로,
사람들에게 꽤나 까다롭고 고집스런 사람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외모적으로 따지면, 영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눈 때문에 한없이 순둥이로 보여지기까지 하다.
또한 영이 자신을 생각하기에도 까다롭고 고집스런 사람이기보다는 어벙하고 순진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을 보는 사람들은 그와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듯 했다.
언젠가 영의 가족 사진을 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사진 속의 영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아휴, 인물이 훤하긴 한데 성깔이 좀 있어 보이네. 서울 깍쟁이처럼 생겼잖아."
어머니께 그 말을 전해들은 영은 동생과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한바탕 웃어 젖혔다.
아마도 '성깔'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에게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황소고집'은 있을지언정 까탈스럽거나 피곤할 정도의 '성깔'이란 것은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성깔'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코미디의 한 대목처럼 느껴지기에 박장대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영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머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내 모습은 타인에게 어렵게 비춰지게 된 것일까?
하긴 성깔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곧 만만찮게 보인다는 뜻도 되니까,
과거의 어리숙한 내 모습은 이제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말로 들어도 될 거야.'
영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서울 깍쟁이 같은 인상으로 보여진다는 것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리고 영은 더 이상, 쉬운 사람이기만 했던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그 아주머니의 발언을 통해 확인까지 하게 되어 몹시 기뻤다.
*********
그리고 몇 주가 지났다.
영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이틀 전에 있었던 술자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친한 친구 몇 명과 평소 영에게 잘 해주던 학교 선배로 이루어진 단출한 술자리였다.
그날, 숫기가 없는 영은 친구들과 선배 앞인데도 불구하고 서먹한 마음에 좀처럼 그들의 이야기에 낄 수가 없었다.
그저 따라주는 술을 묵묵히 받아 마시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영을 보고 있던 선배가 비워진 영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영, 난 도대체 네놈 속을 모르겠다."
"왜..요?"
"'왜요?'라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
"임마! 입에 자물쇠 채우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니 네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게 뭐냐.
이래도 끄덕. 저래도 끄덕. 사람 좋은 모습으로 실실거리기만 하고 정작 네 속은 드러내지 않으니,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너랑 몇 개월을 같이 지내왔어도 다른 애들과는 달리 너라는 놈을 아직도 모르겠어."
영은 선배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선배는 그런 영에게 두손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 흔들고는, 다시 무리들과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영을 안지 얼마 되지 않은 동호라는 친구가 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참, 선배! 영은 참으로 포용력이 많은 것 같지 않아? 여기 있는 철수하고는 완전 딴판이거든.
봐. 철수는 딱 생긴 것만 봐도 성격 깐깐하고 까다로울 것 같잖아.
또 실제로도 얼마나 성격이 딱 부러져? 그런데 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기분 좋은 말만해서 그런지, 굉장히 마음 씀씀이가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거든."
영은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작스런 동호의 말에 귀까지 빨개진 영을, 옆자리에 앉아 흘낏 쳐다보던 철수가 무리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모두들 의외라는 모습으로 철수를 돌아보았다.
"그..그..그래. 철수 말이 맞아. 동호가 말하는 포용력 같은 건 내겐 없어.
오히려 철수보다 내가 더 깐깐하고, 고집스러울 걸?
내 속의 마음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많이 틀리니까 말이야."
영은 슬프게 철수를 한번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건 맞아. 영은 전혀 아니야. 영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거든.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늘 사람 좋은 모습으로, 거리가 있는 이들에게는 다가서기 어려울 만큼 냉정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단지 지금 보여지는 영의 겉모습만으로 포용력 운운하지 말라구."
철수의 싸늘한 이 말에 기분이 몹시 상한 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영의 모습을 본 선배는 상황 수습을 위해,
"철수야, 누구나 사람들은 다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어.
동호가 영을 두고 말한 건, 평소에 드러나는 영의 외형적 성격상
화가 난다거나 기분이 상해도 크게 자기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다 받아들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영은 지금까지 크게 소리내어 화를 낸 적도 없었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다 받아 줄 것 같은 인상을 지니기도 했잖아.
그래서 동호는 영이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거지.
그런 동호가 자신의 마음을 이 자리를 빌어서 얘기한 것을 두고,
철수,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
또 영은 우리들에게는 사람 좋은 넉넉한 모습으로 일관했으니 그런 얘길 들을 만 하잖아.
그러니 철수, 영을 너무 야박하게 몰아세우지 마라. 영은 너와는 아주 가까운 친구 아니냐." 라고 말했다.
선배의 말을 듣던 철수는 묘하게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실소했다.
그리곤 날카롭게 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쨌든지 영이 우리들을 대하는 겉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영의 속마음까지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영? 그런데 그걸 두고 포용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영은 철수의 말이 너무 서운했다. 물론 영 자신도 포용력이 없다고 부인하는 말을 했지만, 철수가 그렇게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단짝 친구 철수가 말이다.
영이 슬쩍 철수의 눈을 바라보니 '포용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으면서 가장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애가 바로, 영 너란 말야.'라고 힐난하는 것만 같았다.
영은 무언의 그 소리가 내내 자신의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아 현기증이 일었다.
잠 순간 침묵을 지키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영은 곧 철수를 향해 조금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철수, 나도 내 자신을 잘 모르겠는데, 네가 날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냐?
네가 그렇게 평하고 얘기할 만큼 나를 잘 알고 있는 거냐?"
"어느 정도는 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확실히 네가 변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너, 그거 아냐?
예전에 내가 알던 영은 없다는 거 말야. 넌 이젠 완전 겉과 속이 다른 비열한 세상의 인간들과 닮아 있단 말야!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알던 영은 없어."
철수는 잔뜩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잔에 담겨있던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영은 철수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또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몰라주는 철수가 야속하기만 했다.
"젠장! 선배, 남이 들어서 좋은 말들 좀 했다고 벌레 보듯 하는 철수 좀 봐.
나만 이런 건가? 나만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세상 사람들 전부가 어느 정도 자기 감정은 숨기고 살잖아.
그러면서 다들 잘 살잖아. 자신의 마음을 가장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그렇게들 잘 살아가잖아."
"임마, 너 철수 말에 마음 많이 상했나 보구나."
"세상에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남들 앞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아니잖아!!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잖아!!
다들 어느 정도 자기감정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가장하며 살아가고 있잖아!!
그런데 철수는 내가 변했다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싫어해! 그런 거잖아!!"
"영, 진정해라. 철수가 너에게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다.
철수는 예전부터 너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니까, 누구보다 너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을 거 아니냐.
영, 네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거야. 그렇지 철수야?
오늘 철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보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시 돋친 말이 나오지. 그렇지, 철수야? 그렇지?"
선배의 말에 철수는 묵묵히 비어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야야!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러냐? 안 되겠다.
분위기도 바꿔 볼 겸, 모두들 술잔 들고 건배나 한번 하자!"
선배가 주도하는 건배를 필두로 해서 무리들은 곧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전환했다.
그리고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살아나, 슬며시 무리들의 얼굴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영은 벌컥벌컥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술잔을 기울이는 철수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철수, 넌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거냐? 예전의 내가 아니라서?
전과 같지 않게 내가 변했기 때문에 싫어진 거야?
하지만 너나 일반의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이런 거 아니었어? 말해 봐! 말 좀 해 보라구!'
철수와 무리들은 이러한 영의 소리 없는 외침에는 아랑곳없이 새로이 화두에 오른 주제를 두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