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것은 검은 것이 괴로움에 포효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견디지 못해 검
은 몸을 상처 내는 것을 알면서도, 념(念)을 멈추지 않았다.
<널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
검은 것은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자신의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리고는
하얀 것의 여린 두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려 세웠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너다! 네가 더럽고 추하다며 경멸하는 나는 너다! 봐!
<br/>나는 너다! 나는 너다!! 나는 너다!!!>
두 어깨에 느껴지는 검은 것의 힘에 하얀 것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너무나 가녀린 그녀는 가쁘게 숨을 쉬며 검은 것의 두 팔 안에서 인형처럼 흐늘
거렸다. 금새 하얀 것의 몸이 다시 짙은 보랏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번엔 검은 것의 눈에 하얀 것의 급격한 신체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지 검은 것
은 종전처럼 팔을 풀지 않았다.
<너, 어쩜 그렇게 잔인하니!>
검은 것은 붉은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하얀 것의 어깨를 더욱 더 강하게 움켜
쥐었다.
<내 소리 때문에 네게로 가야 할 친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길고 긴
<br/>침묵을 지켰다. 내 모습이 흉측하다고 해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조금이라
도 무섭지 않게 보이기 위해 흉물스럽다는 미소나마 지어 보이려 했다. 그런 내
게 넌 왜 이리 잔인한 거냐!>
검은 것은 어디 마음껏 해보라는 듯 갑자기 검은 가슴을 하얀 것에게 들이밀
었다.
<난 널 언제나 지켜주려고 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너로 있게 하려고 했다. 그
<br/>런데 왜 날 미워해? 왜 날 싫어해? 어떻게 넌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널 블랙홀
속에 그대로 던져 버릴 거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니! 너와 함께 하며 들어야 할 경
멸따윈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너 없이 지내야 하는 삶은 평생 피
할수 없는 괴로움이고 고통이다. 그러니 할 수 있으면 어디 마음껏 해봐! 죽이
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해!>
어느 새 하얀 것의 보랏빛 두 눈에선 비 오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온통 몸이 보랏빛으로 변색되어 울고 있는 하얀 것의 상처난 모습이 그제야 검
은 것의 시야에 들어 왔는지 검은 것은 그때까지 자신을 타오르게 하던 분노를
잠재웠다. 그리고 하얀 것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검
은 것의 손 모양을 한 보랏빛 멍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는 하얀 것의 작은 어깨
가 휑하니 드러났다. 또 거칠게 어깨를 흔들리면서 뽑혀져 나간 하얀 것의 피맺
힌 깃털이 어깨와 팔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습도 드러났다.
<내가 넌 줄 알아? 난 그런 끔찍한 짓을 하지 못해. 넌 지금도 이렇게 아무렇
<br/>지 않게 광폭한 짓을 할수 있는 녀석이지만 난 다르다고! 네가 스스로 블랙홀
속으로 뛰어들어! 너 따위로 내 손을 더럽히게 하지 말고! 감정에 혹하면 이성
을 차리지도 못하고 폭풍의 피를 부르는 괴물 주제에 언제나 말은 그럴 듯 하
게 하지. 더러워. 추해.>
하얀 것은 울먹울먹 말했다.
한편 검은 것은 하얀 것의 눈물과 몸의 멍 자국, 그리고 뽑혀져 나간 깃털을 황
망스레 바라 보았다. 그리곤 금빛 머리털을 꽉 움켜쥔 채 <우아아아~~!!!>하
는 짐승의 소리를 또 질러댔다.
하얀 것의 양손을 거칠게 움켜쥘 때와 같은 상황이 또 다시 벌어졌다는 데에 대
한 후회와 자책에서 오는 비명이었다.
하얀 것은 바로 옆에서 검은 것이 짐승의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불구하고 우느
라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짐승의 포효를 잠재운 검은 것이 울고 있는 하얀 것의 뺨으로 조심스
레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검은 것은 고개를 푹 떨구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나는 너무 아파서 그랬다. 나를 원하지 않는 너의 념(念)이 내 가슴을 고통스
<br/>럽게 해서 그랬다. 미안하다. 무서운 모습으로 너를 겁먹게 한 내가 잘못했다.>
<나쁜 녀석.>
하얀 것은 유달리 여린 모습으로 순하디 순한 보랏빛 눈망울에 또 다시 눈물을
담으며, 와르르 전봇대 아래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순간 검은 것은 하얀 것을 부축하기 위해 재빨리 다가가 그 큰 가슴에 안으려
했다.
그러나, 쓰러졌던 하얀 것이 어느샌가 기운을 내더니 독기 서린 눈빛을 빛내며
검은 것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런 하얀 것의 표정은 아주 잔인하고, 무서웠다.
검은 것은 어쩌지도 못하고 특유의 묘한 표정을 자아내며 돌변해 버린 하얀 것
을 처연히 바라보았다
검은 것의 눈에 비친 하얀 것은, 지금까지의 사랑스럽고 순한 모습을 잃기도 했
으려니와 상처입은 몸과 마음으로 몹시 아프고 지쳐보였다.
아무리 다시 새겨 보아도 그녀의 하얀 날개는 뽑혀져 나간 날개 깃에서 묻은 붉
은 피로 얼룩이 졌고, 양어깨와 팔목은 보랏빛의 멍 자국이 선명했으며, 보랏빛
의 몸은 다시 변색을 하여 돌아왔지만 완전한 흰색이 아닌 푸른빛이 군데군데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또한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지저분했고, 찰랑대던 은빛
머리카락도 어수선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우아아아~!>
꼼꼼하게 하얀 것의 모습을 바라보던 검은 것은 다시한번 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런 검은 것의 비명소리는 몹시 처절했고 하염없이 슬프게 울려퍼졌다.
한편 덤불 속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는 검은 것의 비명소리에 자신
의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천상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단말마의 외침으
로밖에 표출시킬 수 없는 검은 것의 고통스런 마음이라니!
여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검은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가 뭐라해
도 검은 것에게 있어 하얀 것의 존재 의미는 삶의 희망이면서 곧 끝이 없는 고
통 그 자체라고. 그러므로 검은 것에게 있어 하얀 것의 존재가 있으나 없으나
늘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것은 어쩔수 없는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