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날 기다리던지 말던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나
를 기다리는 것은 그의 마음이고, 또한 순전히 그가 자초한 일이니까 내가 신
경 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 어떤 마음의 부담 같은 것을 느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도통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수없이 다짐을
하였건만 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날 그가 기다린다는 기차역으로 나가고 말았
던 것이다. 그 날은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보는
날에 비가 온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한 이상
별수가 없었다.
나는 기차역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앞으로 내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려고 하
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비가 오기 때문에 그동안의 내 철칙을
깨고 그를 만나는 것뿐이라고. 또한 그에게 아직 못 들은 답변이 남아있기 때문
이라고. 그렇게 얼굴만 살짝 보여주고, 그의 답변을 듣고, 마지막 인사만 하면
그만 이라고, 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되뇔 뿐이었다.
그날 비는 제법 무겁게 우산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주룩주룩 굵은 빗줄기를 바
라보면서 내내 나는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게다가 나의 온 몸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점점 긴장하고 있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열병에라도
걸린 듯 온몸이 나른하고 후끈거리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 나는 걸으면서도 내 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꿈길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랄까?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랄까? 여하튼 나는 땅을 밟고 있는 것이 아
니라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었으며,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하기도 하고, 많이 불안하기도 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그와의 약속장소인 기차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역을 보
자마자, 그때부터 심장이 물 만난 고기 마냥 활개를 치며 거칠게 뛰기 시작했
다. 쿵쿵대는 심장박동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려댔다. 난감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서서 박동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기차역을 유심
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내 시야에 군복을 입고 서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
이 보였다.
그일까? 쿵! 쿵! 쿵! 마치 거인이 심장 안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어대는 것처럼
심장소리가 더욱 크고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오! 정말이지 나는 그러한 내 감
정의 변화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그 남자가 나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한동안 내 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
며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이내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가르며 내게
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오고 있다! 어쩌지..어쩌지?
나는 맹수 앞에 힘없이 놓여진 어린 동물 마냥 바들바들 떨면서 한발자국도 움
직이질 못하고 내게로 다가서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
다.
『네가 지수지?』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모습으로 그가 내 앞에 우뚝 서며 물었다. 그의 모자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부드러운
미소를 한껏 짓고 서있는 그.
햇볕에 타 검게 그을린 건강한 그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풍부한 감성과 부드러
움이 하나 가득 어려 있었다. 내가 그동안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
나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표정이 풍부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그러한
돌발적인 모습에 그는 갑자기 난색의 표정을 짓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저....신지수씨 아닌가요?』
『........』
『아..죄송합니다. 전 또..제가 아는 사람인줄 알고..』
그는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계속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런 그의 곁에 한발 다가서며 내 우산을 그의 머리위로 씌워주었다.
『맞아. 내가 신지수야.』
나의 이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금새 환하게 펴졌다.
『그렇지? 그래, 느낌에 꼭 너일 것 같더라니! 네...네...네가 지수구나!』
그는 덥석 내 손을 움켜쥐더니 감격에 겨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너무 놀라 황급히 그의 손에 쥐여진 내 손을 거칠
게 빼냈다. 그리곤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미..미안..난..그저.. 지..지수, 너를 만나 너무 바..바..반가운 나머
지...』
『..됐어. 해명하지 않아도 돼.』
그는 무안해진 자신의 손을 툭 아래로 내리고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뜻 모
를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표정 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