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빠져서 늘 너만을 생각하게 되었
어. 이지적이면서 자신감에 넘쳐있는 너의 당당함이 내겐 아주 완벽해 보였
거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한 너. 네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한
나. 우리는 서로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며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들이라
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너에게 알려 주고 싶었어. 너의 동화 같은 사랑을 이룰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말야. 하지만 넌 늘 그런 내 마음의 그물 망에서 교묘
히 빠져나가곤 했지. 내가 조금이라도 다가서려는 시도를 보이면 넌 늘 한발자
국 뒤로 물러서서 나를 막아서곤 했어. 내가 비집고 들어설 수 없도록 차갑게
빗장을 걸어 잠그곤 열지 않는 거야. 넌 아예 내가 들어설 감정을 배제시켜놓
고 너와 같은 내가 되길 강요했었지.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니?
난 널 사랑하는데. 그래서 그 사랑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넌 그런 내게 기
회조차 주지도 않았잖아. 담담하고 싸늘한 어투로 설명적인 글을 보내 놓고는
너처럼 같은 가슴을 지니라고 하면서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만 냈었지. 네가 말
하는 감정의 구분을 넘어선 내게 그렇게 넌 확연히 그 경계라는 것을 그어주곤
했어.
그렇지만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너에게 사랑을 알게 해줄 이는
나 아니면 안 될텐데. 왜 주저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
어. 왜 내게서 우정만을 고집하려는 거니? 네가 내게 했던 말들 난 하나도 이해
하지 못했어. 동화 같은 사랑의 상대가 내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
어. 넌 나 아니면 동화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인데, 그걸 몰라.
신지수, 나만큼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넌 끝까지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니? 나 말이야. 아직까지도 너의 마음을 얻
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몹시 괴롭다.
지수야, 미안.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을 네 마음이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서 미안해. 너 혼란스럽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이
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어. 그건 알지?
나, 이 편지 쓰고 너의 주소는 찢어서 버릴 생각이야. 너와의 약속은 꼭 지키
고 싶거든. 네 주소를 갖고 있으면 제대하고 나서도 네게 계속 편지를 쓰게 될
것 같아서 말야. 그래서 찢어서라도 너의 흔적을 모두 없애 버리려고 해. 그리
고 그동안 내게 보내져 왔던 너의 편지도 주소가 쓰여있던 겉봉투는 전부 없애
버렸어. 감각적이고 감상적인 내가 그나마 이성을 발휘한 행동 중에 하나라고
해 두자. 그리고 너에게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내 사랑이란 것이 고작 그것
뿐이니까.
사랑. 사랑이었단 말인가?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단 말인가? 그의 말처럼 그
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고, 사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친구이상의 감정을 지니
고 내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오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허물어지듯 편
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의 온 몸엔 힘이 하나도 없었고 한없이 떨리
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에 내 육체와 정신이 제 궤도를 잃은 듯
그렇게 온통 혼돈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뜨겁게 열이 오른 얼굴을 감싸쥐며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미 예
감하던 사실을 알았는데도, 좀처럼 심장박동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몽롱한 기분에 젖어있는 내 모습만이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
음을 간신히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이 싸
하게 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훈이가 이제 떠나려 한다>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바로 <지훈이가 내게서 떠나려 한다>는 사실이
었다. 그래서 인가?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오, 아
닐 거야. 그런 것은 아닐 거야. 그럼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나
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꺼번에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밀려들어 어느 장단
에 맞추어 수습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는 가
운데서도 내 스스로가 인정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솟구
쳐 올라와 나름대로 이유를 찾으려 애를 썼다. 그래. 아마도 일년을 넘게 편지
를 주고받던 그와의 인연이 이 편지를 끝으로 끊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
야. 그래서 이런 감정이며 현상들이 생기는 것일 거야. 마지막이라는 감정적 배
경이 숨어있던 내 낯선 감정들을 밖으로 표출시키게 한 거야. 그래, 그러니까
그의 편지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거야. 그래, 그런 거야. 겨우 내
안에서 합리화된 답을 찾은 뒤,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던 편지들을 쓸어모아 미
처 읽지 못한 마지막장을 찾아 들었다.
참, 네가 지난번 편지에 썼던 질문에는 미처 답을 못하고
가겠구나. 지난 번 네가 보내온 비 오던 날의 그 편지는 내가 그동안 너에게 받
아 본 편지 중에서 제일로 기분이 좋았던 글이었다는 것을 아니? 난 네가 한없
이 강인하고 빈틈이 없는 여자인줄만 알았지 뭐야. 그런데 그 편지 받고 너도
감정을 지닌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어. 여린 너의 모습을 보니까 전보다 더한
친근감이 생기던걸. 가끔은 너의 그러한 모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
면 좋을 듯 싶어. 그러면 사람들이 네게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게 될 거
야. 넌 아무리 생각해도 네 감정에 너무 뻣뻣한 게 흠이거든. 하긴 그러한 모습
이 너를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매력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정말 장문의 편지
였지? 이젠 손이 다 아프다.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
데 쓰면서 나도 놀라고 있는 중이야.
마지막으로 나와 펜팔을 했던 친구의 얼굴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볼 수 있을
까? 제대하는 날, 네가 살고 있는 곳을 지나거든. 그때 잠시 만났으면 좋겠어.
오는 7월 20일 오후 3시에 네가 살고 있는 곳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딱
한시간만 기다릴 거야. 그 이후까지도 안 나오면 네가 나와 만날 생각이 없는
걸로 알고 돌아갈 거야. 만약 그때 네가 나와 준다면 오늘 못 다한 너의 질문
에 대한 답을 들려줄게. 비가 오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그 답을 알고 싶다면 꼭 나오길 바래. 신지수!! 몸 건강히 잘 있어. 그리고 너와
의 기억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게. 지수야, 안녕.
난 그의 편지를 읽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펜팔은 어디까
지나 펜팔로써 끝내야 한다는 내 신조를 지키고 싶었다. 펜팔을 주고받았던 상
대와 얼굴을 맞대고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그동안의 내 펜팔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순수한 펜팔친구로써의 면모를 완전히 저
버리지 않았는가. 내게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껴버린 그를 직접 만난다는 건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지막 편지를 끝으로 그를 잊어
버리고 우리들의 관계를 여기서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우리들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건더기도 보여선 안 되는 바로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