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는 어느덧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이 되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그가 보
내온 편지를 쭉 읽다가 보니 마지막에 "넌, 비가 오면 무슨 생각을 하니?" 라는
조금은 특이한 질문의 글이 적혀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즉시 편지지
를 꺼내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의 말을 장황히 늘어놓으며 바쁘게 답장을 써나
가기 시작했다. 마침 비도 오고 해서 그의 질문에 답을 하기엔 아주 그만이었
다.
To. 지훈에게
비가 오면 사람들은 감정에 지배를 많이 받는다더라. 그래서 난 비가 오면 아
무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을 해. 물론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라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지. 그래도 비 오는 날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
곤 해. 비 오는 날의 생각들은 이상하게도 모두가 위험스럽거든.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기분은 쳐지게 되어있고, 감정에 쏠리게 되어서 너무나 힘이 들어.
언젠가 네게 말했던 내 마음의 경계라는 것이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고나 할
까? 뭐, 그런 느낌을 깊게 받아. 비 오는 날의 나를 보면, 너무나 낯설어서 내
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래서 비 오는 날은 하루종일 집에만 틀
어박혀서 내내 음악만 듣고 있지.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
아. 되도록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해. 그래야 낯설고, 감상적인 내 모
습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게 되니까.
이런...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중에도 비가 오고 있어. 기분도 우울하고 축
늘어지는 게 못 견디도록 가슴이 아파. 이렇게 가슴이 아플 땐 누군가의 어깨
에 한없이 기대고 싶어져. 내가 아프지 않도록 보듬어 주고 감싸 줄 수 있는 이
의 가슴에 폭 싸여서 어둡고 음울한 기분을 잊어보고 싶어져.
지금 밖엔 비가 와. 내 가슴을 두드리면서 속삭이는 빗소리가 견딜 수 없도록
고통스럽게 해.
지금 비가 와. 하염없이...하염없이...비가 와. 그런데 지훈아, 넌 비가 오면 무
슨 생각을 하니? 치사하게 내게만 질문을 던져 놓고 넌 아무 말도 안 할 생각이
야? 지훈아, 나 궁금해. 넌 비가 오면 무슨 생각을 하니?
나는 그날, 미친 사람처럼 비 오는 거리를 비척이며 편지를 부치고 왔다. 무슨
정신으로 편지를 부쳤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나 격한 기운에 못 이
겨 부랴부랴 편지를 쓰고 보냈던 기억만 날뿐,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몇 일이 지나고 나서야, 비 오던 날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땅을 치
며 후회했다.
하필이면 비 오는 날에 그의 편지를 받을 건 뭐였담. 하필이면 비 오는 날에 답
장을 써서 전에 없는 감상적인 내 마음을 드러낼 건 또 뭐였담. 후회..후회...
늘 그에게 보내는 편지엔 나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는데, 그리고 언제
나 보내도 후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뿐이었는데, 처음
으로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갔던 것이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요상한
그의 편지에 대한 두통의 답신을 보낸 후로, 계속 그의 편지에 감상적인 내용
의 글만을 보냈던 것 같았다. 어쨌든 후회..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곧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 편지를 보내고, 2주 후면 그와 내가 약속했던
펜팔 제한기한이 다 되기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래서 난 예전처럼 평화로운 생활
을 별 탈 없이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 그에게서 마지
막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의 마지막 편지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두툼했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그렇게 그는 편지 내용을 두툼하게 써서 보내왔던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인사
를 아주 거창하게 하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나는 호기심을 안고
조심조심 편지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을 읽어보았다.
To. 지수에게
나, 일주일 후면 곧 제대야. 우리의 약속기한이 다 되었다는 뜻도 되겠지?
어째 좀 시원섭섭하다. 지금 보내는 편지가 너와의 마지막 편지가 될 거라고 생
각하니까, 난 좀 우울해. 괜스레 서운하기도 하고 말야. 넌 어떤 기분일까? 너
는 시원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난 네가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오늘 왜 이러지? 오늘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아마도 마
지막이라는 느낌이 주는 비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신지수! 그동안 잘 있었니? 지난 번, 비 오던 날 네 기분은 괜찮았는지 모르겠
다. 그 날 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참 좋겠구나 하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 네
가 기댈 수 있게 내 어깨와 가슴을 빌려 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
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졌어. 지수야, 그 날.. 많이 힘들었니?
넌 비가 오면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가 보더라. 한번보고 싶어, 비 오는 날의
네 모습을..
참, 그 날 네 편지 받고 곧바로 답장을 쓰고 싶었는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서 이제야 편지를 쓴다. 오늘은 너에게 그동안 못했던 말 다 할 생각으로 펜을
들었으니 너 각오하고 봐야 할거다. 그러니까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읽도록
해. 내 입장에서 볼 때 별 말은 없지 만서도 네 입장에서 볼 때는 많이 혼란스러
워할 내용일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마음을 정비하고 읽으라고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자, 나 너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야? 알
겠지?
요 몇 달 동안은 너에게서 편지가 끈길까 봐 내 감정을 드러내는 걸 아주 조심
스러워 했었지. 물론 간간이 내 감정 그대로 네게 보이기도 했었지만 내 감정
을 드러내지 않으려 자제하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더 많았어. 네가 감정적인 글
을 끔찍이도 싫어하니까 몇 번을 다시 고쳐 쓰곤 해야했지. 너 때문에 편지 쓰
는 게 곤욕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그래도 너를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뻐.
지수야, 오늘은 너에게 내 진심을 다 말하고 싶어. 어차피 우리의 공식적인 마
지막 편지이고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편지 안 하
겠다고 협박해도,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하고 해명하려는 글을 보낸다 해
도, 이젠 하나도 겁나지 않아. 어차피 우리의 약속 기한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으니까.
난 여기까지 읽고는 갑자기 두근대는 심장소리에 어쩔 줄 몰라 두 눈을 꼭 감
고 말았다. 왜 갑자기 가슴속에 불이 난 것처럼 뜨겁게 온 몸을 달구는 것인지.
왜 심장은 주책도 없이 쿵쿵 뛰어대는지. 너무나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와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도저히 눈을 뜨고 다음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편지를 계속 읽으면 후
에 느끼게 될 내 마음을 나도 어쩔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히 눈
을 뜨고 읽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레임
과 몽롱한 기분에 젖어들어 한동안 꼼짝을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
로는 계속 생각을 했다.
왜 갑자기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젠 그와
난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끝인 거야. 그냥 쭉 읽고 모른 척 하면 돼. 감정이 내
이성을 지배한다 해도 우린 이젠 끝이니까 괜찮을 거야. 이 녀석, 조금은 다른
이들과 틀린 구석이 있었지. 그래도 미련 따위 가질 필요는 없는 사람이야. 괜
찮을 거야. 별말 없을 거야. 내가 너무 예민한 것 뿐이야.
이렇게 가까스로 마음에 평정을 찾은 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살그머니 뜨고
는 나머지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나, 처음부터 네가 좋아 편지하게 되었던 거 모르
지? 동석이를 통해 알게 된 너의 집 주소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넌 알고 있겠지만, 그건 모두 다 나로부터 의도된 것이었어. 우연히 동석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특이한 경력의 너에 대해 알게 되었고, 너에 대한 호감이 극
에 달아올라서 동석이에게 조르고 졸라 너의 주소를 받게 되었던 거야. 지금 이
때까지 한번도 사랑해 본적 없고, 그러면서도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꾼다는 특이
한 친구이고, 동화처럼 사랑을 하고 싶다면서도 자신 앞의 이성들을 언제나 우
정이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너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동하게 했었
지. 그래서 너의 주소를 받자마자 무작정 네게 편지를 보냈던 거야. 넌 내 편지
에 시원스러우면서도 똑 부러지게 답장을 보내왔지. 넌 언제나 흔들림 없고 확
신에 차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감각적인 마음에 신선함을 안겨 주었어. 그
리고 감정적이기만 한 내 마음을 제어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도 했어. 너도 알
다시피 난, 무지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잖아. 너처럼 냉정히 세상을 바라
보는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도 않아.
난 말야. 나와 너무나 다른 너에게 이끌려 지금까지 오게 되었어. 그건 너도 마
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지수야, 정말 우리 대단하지 않니? 혹시라도 너는 아니
었다고 부인할 생각이라면 아예 하지도 마. 그렇지 않았다면 너와 나, 지금까
지 올 수도 없었어.
어쨌든지 간에 너의 특이한 성격을 처음부터 모른 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네가 그런 성격의 친구라는 걸 동석이를 통해서, 또 너의 글을 통해서 충
분히 확인하기도 했으니.
난 처음부터 네가 좋았다. 나처럼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너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난 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더 깊이 네게 빠져
들어갔다.
난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잠시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나는 냉정
함을 잃지 않기 위해 뛰어대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직도 읽지 않은
몇 장의 편지지가 들린 내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앞으로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내용으로 일관
된다면 필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숨을 깊이
내쉬며, 다시 편지지 위로 시선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