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역시 내가 우려하던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편지를 주고
받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는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래서 나는 내 마음이 허용하는 한도를 훨씬 넘어서는 그의 마음에 점점 심한 불
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To. 지수에게
널 가장 잘 알고 있는 남자는 아마 내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난 너처럼 감정
이 배제된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또한 너도 나처럼 이
성이 배제된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지수, 우린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란 생각이 들지 않니? 서로에게 모
자란 점을 우린 완벽하게 보완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물론 이건 나 혼자만
의 생각이란 거 안다. 너는 우리 둘 사이에 우정이상의 감정이 개입하는 걸 원
치 않는 사람이니까.
지금 네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을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고 한
다. 네가 지금 내 편지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상하게도 훤히 보이는 듯
해서 말이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걱정 마라. 당장 너에
게 어떤 답을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또한 어떤 답을 원하는 것
도 아니다. 네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기에 당분간은 내가 원하는 답을 너에게서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냥 너를 가장 잘 아는 남자가 내가 최초라는 사실만을 알
려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넌 그런 사실만 알면 된다.
신지수, 내가 당분간이란 단어를 쓴 이유를 알 수 있겠니? 실은 나도 왜 당분
간이라는 단어를 썼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나도 내 감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서 당분간이라는 조건부 단어를 적어 보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내 감정
은 너무나 명확한데 그걸 받아들여줄 너의 감정이 너무나 불명확해서 나도 모
르게 당분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지도 모른다. 이런 내 감정은 나 혼자만 느
껴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거든. 넌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도 전혀 알
아듣지 못하겠지? 아니, 넌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척하면서 인정하려 하지 않
을지도 모른다.
참, 넌 잘 있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하고는 무관하게 너는 편히 잘 지
내고 있는 거지?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난 이만 여기서 안녕! 한다.
그가 보내오는 편지는 점점 감상적으로 변해갔고, 그런 그의 편지를 볼 때마
다 나는 극도의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또한 내가 그의
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자꾸 늘어만 갔다.
급기야 나는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르다
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든 주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전과는 다르
게 거리감이 있는 내용의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가 내게서 느낀다던 차가운 모
습과, 불안정한 심리를 빈번히 글에 내비쳐 보이기도 했다.
To. 지훈에게
난 지극히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은 싫어. 난 그런 류의 사람들이 정말 무
섭거든.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끌려 행동하는 그들의 무모한 몸짓은 나를 겁먹
게 해. 그들은 자신의 감정하나 주체하지 못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지 알지 못해.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다른 이의 마음도 생각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감정뿐이니까. 그러니 그런 무모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내겐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 될 수밖에 없지. 그들을 대하고 있으면 말야. 어떻게 돌변
할지 앞으로의 상황을 예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난 늘 불안하고 초조해.
감각적인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빠져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은 생각
을 하는 줄 알거든.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그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
다고 착각을 하는 거야. 하긴 그들의 목적은 어차피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데에 있으니, 다른 이의 마음은 전혀 안중에도 없을 수밖에 없겠지.
정말 편리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언제나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건 나와 같은 이들이란 말이야. 알아?
그런데 참 이상하지? 요즘 네가 보내오는 편지글에서 난 심한 불안을 느끼거
든. 네가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점점 닮아 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너...너무 감상에 빠져들지 않았으면 해. 그래줄 수 있겠니? ...네가 좀 도와줘.
그래야 앞으로 내가 편하게 너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계약기간까지 편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네가 좀 도와 줘.
나의 이 편지에 대한 그의 답신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느 정도 내 의도
는 파악했으리라고 확신했다. 나는 확실히 굳히기를 하기 위해 며칠 후, 그에
게 편지를 또 한통 적어 보냈다.
To. 지훈에게
남녀관계에서의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난 말이지. 동성의 친구와는
달리 이성의 친구에게서 신경을 써야 할 것 한가지는 꼭 지켜야 우정을 지속시
킬 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말야. <감정의 구분>을 확실히 하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야. 정말이지 이 <감정의 구분>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우정을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까지 진행 될 수 있는 위험을 지니
게 되니까. 동성의 친구에겐 굳이 <감정의 구분>을 하지 않아도 <사랑>으로까
지 넘어갈 수 있는 소지가 만들어지지 않잖아. 설사 <사랑>을 느낀다 해도 이
성의 친구에게서 느끼는 것하고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
어. 그래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우정은 끝까지 남게 되니까.
그러나 그것이 이성의 친구일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사랑이 된 순간부터 그
동안 쌓아왔던 우정은 깨어지게 되고 마는 거야.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할 정도
로 감정의 불꽃에 휘말리게 되고 말지. 우정을 깨고 <사랑>의 상대로써 관계
를 시작해야 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이성의
친구와 우정을 맺을 때는 <감정의 구분>에 경계를 확실히 그어 두어야 하는 거
야.
언젠가 네가 말한 내 마음의 한계선 안으로 널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이
젠 좀 알 수 있겠니?
넌 내 친구야. 난 네가 끝까지 나의 소중한 우정으로 남길 바래.
있잖아, 너 아니? 난 정말이지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이 싫어. 그게 문제
야. 사랑의 감정이란 것이 내가 싫어하는 감상적인 것들뿐이라는 거. 그래서 나
는 말야. 감상적이지 않아도 되는 우정이 더 좋아. 사랑보다 편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언제라도 이성적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이기엔 아주 적격이거
든. 또 독립적이기도 하지.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깊이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대
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물론 소설이나 동화 속에서 나올
듯한 멋진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네 말마따나 현실의 나는 많이 힘들 것 같
아. 나 정말 문제가 많지? 하지만 너처럼 좋은 친구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겠
어. 내 친구 지훈아, 그래도 너 나랑 계속 친구 해 주는 거지?
효과를 보았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내가 보낸 두통의 편지글에 한참이 지나서
야 그의 답장이 왔다. 다행히도 그의 글은 처음 내게 보냈던 것처럼 자신의 감
정을 배제하고, 일반적인 자신의 생활상만을 적은 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내
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잠도 편히 이룰 수 있
게 되었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