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가 내게 이런 글을 적어 보
내 왔다.
To. 지수에게
아마도 넌, 너의 이중적이고 특이한 모습 때문에 "사랑"이란 걸 한번도 해보
지 못했을 것 같아.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네 깊은 마음을 비집고 발을 들여놓
지 못했을 테니까 말야. 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이라도 누군가와 <사랑>
에 빠져 본 적 있어?
없지? 없을 거야. 난 네가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데에 확실한 한
표를 던진다.
내가 아는 너라면 역시나 사랑 같은 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해 보지 못했을
거라 확신해.
언젠가 지수, 네가 내게 보내온 편지에 적어 보냈던 얘기 기억해?
나는 전에 그에게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정열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는 내
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소설이나 동화 속에서 나오는 남녀 주인공들처
럼 우연히 만나 한눈에 반해서 이루어지는 사랑. 스쳐 가는 강렬한 눈빛 속에
거침없이 뛰어대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극적인 사건이 얽히는 가운데 힘겹
게 이루어지는 정열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전했었다. 소설이나 동화 속에서
나 나옴직한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지극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도 했었다. 그가 그런 내 편지의 내용을 깊이 생
각하고 기억할 줄은 몰랐었는데 전해져 온 그의 편지글에서 나의 사랑관에 깊
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네 마음의 벽을 허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널 사랑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할거야. 아무도 바로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네 마음을
열지 않는 이상, 넌 평생을 가도 네가 꿈꾸는 <사랑>을 보지 못할 거다. 그러니
까 네가 쳐놓은 경계선 이면의 모습을 드러내야만 진정 네가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넌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면서도 정작 그럴 기회가 다가오
면 너의 마음을 닫아버려. 그리곤 다가서지 못하도록 밀어내지. 아주 야박하고
매몰차게 말야. 넌 네가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 모르지? 남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넌 이해심 많고, 말도 잘 들어 주고, 배려심도 있고, 또 어느 정도 자기 주
장이 강한 사람인줄 알 거야. 하지만 내가 보는 너는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
다. 넌 끔찍하게도 냉정하고 자기제어가 철저한 사람이며, 지극히 겁이 많은 사
람이야. 그런 속마음을 너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감추며 포장하고
있을 뿐이지. 그건 너를 깊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모습일거야. 내 말
이 틀렸다면 반박해도 좋아. 하지만, 내 말이 맞는 거라면 그런 너의 이중성은
빨리 떨쳐버려야 해. 네가 꿈꾸는 사랑이 다가설 수 있도록.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넌 영영 사랑이란 걸 할 수 없을 것 같아. 넌 사랑을 하기
엔 너무 이성이 앞서 있거든. 감정과 가슴이 우선이 되어야 할 사랑에, 머리가
앞선 이성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건 도통 힘든 장애가 아닐 수 없거든. 진
정 네가 <사랑>이란 걸 할 용의가 있다면 내 말 잘 생각해 봐라.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 편지글을 통해 보여진 모습만으로도 나의 마
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니!! 나는 그의 예리하고 민감한 감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내 숨겨진 특성을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친
구라는 것이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겁이 났다. 내가 그에
게 나를 너무 내보인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는 그 시점에서 우리들의 관계에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상대가 깊이 나를 알게 되고, 심각하게 생각하려는 조짐을 보이
기 전에 나는 먼저 이별을 고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 글을 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감성과 지성을 갖춘, 그야말로 보기 드문 펜팔친구였
다. 아직은 끝내고 싶지 않을 만큼 아주 마음에 드는 그런 친구...
또한 그와 약속했던 펜팔 제한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
는 결국 처음 의도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펜팔 제한기간이 다가올 때까지 그와
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내심 그가 나를 깊이 알지 못하기를 바라면
서. 그가 나를 그의 마음에 가까이 둘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자의 직감이라고 할까? 그
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내 일부일 수밖에 없는 편지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나를 우정의 감정을 넘어 특별
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자꾸만 품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
고서야 어찌 민감하게 나의 심리상태며 마음을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단 말인
가. 난 그의 그런 예리함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또한 무척 두
렵기도 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