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편지를 나눌 때 보이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다. 어느 누구를 막론
하고 편지를 주고받을 때면, 항상 처음 보내는 편지에다 펜팔의 유효기한을 정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난 그에게도, 그가 <군대 제대할 때까지만>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았다. 그는 그런 나의 제안에 흔쾌히 승낙했고, 그때부터 우린 서로의 합의
하에 1년여가량 좋은 펜팔친구로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이쯤에서, 내가 갑자기 3년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궁금하지 않다고 하려는 사람이 있
는가? 그렇다면 난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 궁금하지도 않다면서 이 글은 왜 보고 있는 거야?"
혹시라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그때 당시 이해되지 않았던 모
든 감정들을 내 스스로에게 해명하기 위해, 또한 이 글을 보여 줄 소중한 그 사
람에게 그때 당시의 내 진심을 알려 주기 위해, 나는 이 기록을 남긴다.
이제 지지부진한 얘기는 여기서 접어두고, 다시 3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야
겠다.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신지수가 있었던 그때의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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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펜팔을 하던 그는 늘 내게 '넌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다'라고 했었다. 한없
이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상대의 이야기를 같이 공감하고 느
끼는 나의 유연한 감성이 유쾌하게 자신의 가슴을 채워주는 것 같은데도, 막상
좀더 나를 알기 위해 점점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잔뜩 몸을 사리고, 여지없이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한치의 경계를
흩트리지 않는 보초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는 그런 내 모습
이 너무나 차갑고 냉정해 보여서, 다가서기가 조심스럽고 겁이 난다고. 또한 가
끔씩 자신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는 편지를 보내면, 나는 어김없이 극도의 불안
정한 정서를 내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이 불안에 떨게 만든다고. 그래서 그
는 가끔 내 편지를 받아 볼 때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변하는 내 감성을 그
대로 쫓아 자신의 감정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을 경험한다고. 그런 이유로 그는
내 편지를 받을 때마다 항상 '특이한 친구로구나'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또 어느 날인가는 나를 두고 한결같은 사람이라 했었다. 아마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와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내 행동이 그에게는 한결같은 사람으로 보여지
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모든 이성의 친구들과는 언제나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우정을 나누어 왔다.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마음먹고 그와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습관처럼 몸에 배여 자연
스럽게 형성된 거리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들에게도 그랬듯
이, 그에게도 늘 어느 정도의 적정거리를 유지하였다. 그가 나를 두고 한결같
은 사람이라 말할 만큼 철저히 그렇게.
어찌되었든 그는 나와의 펜팔에서 뭔가 색다른 어떤 특별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아주 진지했으며, 매우 다채로운 모습들을 편지를 통해 내게 보
여주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달리, 그와의 관계를 내 일상에
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 중의 하나라고만 여겼을 뿐 그 어떤 특별함도 느끼지 않
았다. 그저 내 무료한 일상에 재미를 더하기 위한 펜팔 상대로만 생각했다고나
할까? 어차피 처음부터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한 펜팔이었으니, 뭔가 특별할
게 있다고 생각할 건더기도 없었던 것이다.
뭔가 특별함을 느끼는 남자와 일상의 한 부분 이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여자.
그와 나의 관계는 이렇듯 처음부터 서로의 생각과 관점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
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그와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
고 전에 펜팔을 했던 상대들과는 다르게, 어떤 날은 아주 가끔씩 그의 편지를
몹시 간절하게 기다릴 때도 있었다.
누군가가 "왜 유독 그의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거죠?" 라고 굳이 이
이유를 물어 온다면 난 , "그건 아마도 그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일한 사
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종종 내가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 따라 시시각각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곤
했었는데, 그런 모습은 어김없이 그의 편지글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나의 흥미
를 유발시켰으며, 어떻게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라는 호기심을 갖
도록 만들었다.
언젠가 그가 나를 두고, "너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이한 면을 지니고 있어
서 꽤 흥미롭다"고 했었지만, 나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그가
오히려 더 특이해 보였고, 또한 흥미로웠다. 그래서 늘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나는 그의 직설적이면서도 꾸밈이 없는 솔직한 발언들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
까지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나에 대한 얘기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
의 용기에,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그의 감성에 나는 언제나 감
탄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나의 글을 통해 보여지는 내 모습에 대해 거짓없이 자
신의 느낌을 다 말해 주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
러난다는 건, 정말이지 묘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와 남
이 보는 자아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렇듯 나는 내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그의 관점에서 되새겨 볼 수 있
다는 사실에서 묘한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객관적으로 나를 뜯어 볼
수 있게 만드는, 그의 솔직 담백한 글들은 참으로 신선하게 내 가슴을 가득 채
우곤 했었다. 어쨌든, 그와의 펜팔은 그때까지 해왔던 이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
낌이 들었으며, 그러한 차별성 때문인지 몰라도, 아님 특별한 그의 솔직함과 감
상적인 마음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와의 펜팔을 아주 즐겁게 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