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여린 숨소리와 몸의 체온이 남자에게 그대로 전해질만큼 우산 속의 공
간은 턱없이 비좁았다.
"아저씨는 내게 상처를 주었어요."
그녀는 심술궂게 웃으며 남자에게 더욱 바짝 다가섰다
"무..무슨..소릴.."
한층 더 가까워진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따위 어설픈 동정으로 사람 비참하게 만들 바에는, 차라리 거리의 사람들처
럼 날 보는 것이 훨씬 나아요. 아저씬 조금은 저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
고 있겠죠? 하지만 아저씨는 저들과 크게 다를 게 없어요. 그나마 차이라면 불
필요하게 남의 인생사에 관심이 많아 직접적으로 관여하려는 것 정도겠죠. 그
런 아저씨의 가짜 모습을 믿을 뻔 했지 뭐예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
는 본능에 가까운 관심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아저씨의 마음을 말이에
요. 그런 아저씨로 인해 상처 입은 내 마음이 울고 있는 소리가 아저씨 귀엔 들
리지 않나요? 정말 마음이 아파 미치겠어요. 너무 아파서.."
남자는 그녀의 체취와 부드럽게 귓속을 넘나드는 나긋나긋한 숨결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그러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그녀를 보며 본능적
으로 욕정을 느꼈던 자신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남자는 자신의 코앞에서 가냘프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
녀의 온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슬픔에 젖은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라도 되는 듯 애잔히 그의 가슴을 젖어 들게 했다. 남자는 갑자기 그녀
가 가엾게 여겨졌다. 또 자세히 보니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가 도와 주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녀에게선 무언가가 몹시 결핍이 되어 있는
듯 했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는 심술궂게 웃고는 있지만 또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내내 그녀가 자신에게 바짝 다가서서 결핍이 된 무엇
인가를 채우기 위해 간절한 눈빛을 집요하게 보냈던 것을 떠올렸다. '도와주세
요' 하고 무게를 실어 청했던 그녀의 모습도 새삼 다시 그려졌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녀가 청한 도움은 단지 비를 피하도록 우산을 씌워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을 그는 흡족
하게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남자는 또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결핍이 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는 그 누구라
도 채워주어야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불명확하고 광범위해서 그 누구도 정확
히 알고 흡족하게 채워 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녀라는 본체를 완연히 꿰뚫어
알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무척 힘들 것이고, 조금은 독특하고 까다로운 그녀의
모든 것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거라고.
급기야 남자는, 그 어느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관심 있게 지켜보려는 노력을 하
지 않는 이상 그녀는 그 무엇인가가 결핍이 된 상태로 살아야 할거라는 결과까
지 내고 말았다. 순간 남자의 심장에 찌르르- 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미안해요. 도움은커녕 오히려 아가씨에게 상처만 주게 되었군요. 정말이지 아
가씨에겐 미안하고 또 부끄럽군요."
여자에 대해 한참 생각하던 남자는 욕정에 혼미해진 자신의 눈빛을 다시 또렷
하게 빛내며 말했다.
남자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그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워버렸다. 그리곤 아
직까지도 파리한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은 푸른색의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아저씨, 나와 친구 할래요? 친구가 되면 내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친구끼리 거추장스러운 우산은 버려두고 이 거리를 날이 새도록 거닐기로 해
요. 있잖아요.. 빗속을 거니는 건 세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도 이
상하지 않아요. 아저씨, 난 너무 오랫동안 혼자 이 빗속에 있었어요. 그리고 세
상의 사람들은 내가 혼자 빗속에 있는 동안 우산을 쓰고 날 바라봐 왔어요."
그녀는 절절한 몸짓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밝았
다. 그전까지 남자가 느껴왔던 결핍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급격한
변화에 남자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을 하려해도 남자가
보는 그녀는 정말 이상했다.
"이봐요, 아가씨. 비가 오고 있어요. 비를 피하기 위해선 우산이 필요해요. 또
우리가 친구하기에는 아직 서로에 대해 너무 몰라요. 성급하게 판단을 하기에
는 좀.."
남자는 자꾸만 빗속으로 이끌려는 그녀를 완강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고. 친구가 되려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어야 하죠.
또 서로 비슷한 부분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아가씨와 내가 친구 하기엔 너무
차이가 나요. 그러니까 우린 너무 달라요."
그녀는 남자를 끌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남자를 보는 그녀의 얼굴엔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저씨는 역시 잠시잠깐 타인의 삶에 들어왔다가 사라져 가는 신기루 같은 사
람이었군요. 마음을 움직일 것 같은 달콤한 말과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와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신기루 말이에요! 자신은 진심도 아니면서!! 그저 단
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말만 할 뿐이면서!! 그러면
서도 뒤돌아 서서는 스스로 뿌듯해 하겠죠. 그 허울좋은 자신의 양심이라는 것
에 자랑스러워하겠죠. 진짜가 뭔지도 모르면서.. 가짜가 진짜인 듯 행세 할 거
라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면 내가 쉽게 구분 할 수 있잖아
요! 기대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녀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매섭게 남자를 노려보았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남자의 눈을 집어삼킬 듯이.
남자는 그런 그녀의 서늘한 모습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분노로 씩씩대는
그녀의 숨결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보인 작은 관심이 이렇
듯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 예상하지 못했던 남자는 그녀의 말에 한마디 대꾸
도 하지 못하고 빗줄기 같은 땀만 철철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