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시야 사이로 검은 강물을 헤치며 지나가는 유람선이 보인다. 이곳에 온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울 밤이라서 그런지 강바람이 상당히 새찼지만, 추위 따위는 이미 내 안중에 없었다.
난 이제 모든 걸 잃었다. 내 집도, 내 친구들도, 내 아르바이트자리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나의 사랑하는 그녀도..
이제 나에게 남은건 하나도 없다.
난 다시 고개를 떨구어 바닥을 바라보았다. 나.. 그냥 이대로 한강물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면 어떨까..
죽어버리면 모든게 잊혀지지 않을까..
하지만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역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 인가 보다. 그럼 앞으로..
앞으로 이제 난 뭘 해야 할까. 난 옆에 서 있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이쪽 강변에 데려다 주고 나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 옆에 서서 강물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그는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도 나를 도와 주는 바람에 나랑 비슷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왜 도와주었을까.. 하기야 그가 없었으면 이미 난 산속에 파묻혀 버렸겠지..
차라리 파묻혀 버렸으면 더 났지 않았을까..
이제 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시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눈물에 젖어 희미하게 보이는시야 사이로, 잠깐동안 반짝이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 아.....'
난 오른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반짝임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반지였다.
그녀가 나에게 1000일날 선물해 준 반지. 우리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준 반지....
그 반지가 내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어져 가로등 불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난 반지를 좀 더 잘 보기 위해 새끼손가락에서 빼서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내가 손바닥을 조금씩 움직이자, 반지가 가로등불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 빛 사이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즐겁던, 그리고 때론 슬펐던 기억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간다.
아.. 그리고 그날밤.. 서로 반지를 선물하던 그 날 밤의 그녀의 모습이 빛 사이로 아련히 떠오른다.
' 오빠.. 세상이 우리를 방해하더라도, 우리 사랑 변치 말구.. 이렇게 영원히..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영원히... 서로만을 사랑하기로 해요.. 알았죠??
후훗... 오빠.. 우리 이 촛불에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약속..'
'약속.......'
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그래.. 난 그녀와 약속을 했어.
세상이 우리를 방해하더라도, 영원히 서로를 사랑하기로.. 난 반지를 놓고 있던 손을 꽉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 그녀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또 나도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는데.. 왜 우린 함께 할 수 없는 걸까..
부.. 권력..명예.. 그런게 다 뭐길래.. 왜 한 사람이 그런 기준으로 평가가 되야 하는가...
난 잠시동안 세상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 장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그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
그렇다. 난 결심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그녀를 내게서 뺏기지 않겠다고...
어떤일이 있어도 그녀를 내 곁에 두겠다고 결심한 것이였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잠시동안 강쪽을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 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강아.. 잘못하면 오늘이 너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 될 수 있겠구나...
항상 않 좋은 일이 있을때마다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이 곳..
한강변.. 난 애처로운 눈빛으로 한강을 한번 쳐다 본 후, 손에 들고있던 반지를 다시 왼손에 끼고 그를 따라갔다.
한 30분 정도 차로 달렸을까. 자정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그녀의 집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집을 두 블록 정도 남겨 둔 시점에서 차를 도로곁으로 붙여 세웠다.
'끼익..'
'............'
언제나 처럼, 그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으며 생각에 잠긴듯한 눈빛을 보였다.
난 잠시동안 그런 그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오늘.. '
'..........'
그는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평소의 생활 때문인지 인상 자체에서는 약간 험악한 기운이 풍겼지만, 난 그의 눈을 통해서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동안 나를 바라본 후, 다시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난 잠시동안 그를 더 바라보다가, 고개를 약간 끄덕여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나?'
그가 처음으로, 아주 조용한 어조로 나에게 말을 했다. 난 나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와 같이 생각에 찬 눈을 하며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라면 그녀를 말하는건가...
난 뜻밖의 질문에 당황스러워 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예...예.....'
'...........'
그는 나의 대답에 다시 한번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앞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혼자선 무리다. 내가 집 앞까지 태워다 줄테니까, 내가 차를 멈추면 내려서 바로 문 있는 쪽으로 뛰어라. '
'예...예......'
지금 이 사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하기야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내가 그의 도움을 받아서 그쪽에서 도망을 친걸 그녀의 삼촌도 이미 알았을테니까, 내가 그녀의 집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집 주변에 건달들을 배치해 놓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난 얼마 안있으면 다가올 또 한번의 격전에 대한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그는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재빠르게 기아를 바꾸더니 빠른 속도로 차를 앞으로 몰아나가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두 골목.. 두 골목만 더 돌아가면 그녀의 집이 보이는 골목에 도달하게 된다.
심장 소리가 내 전신을 감싸며 귀를 울려오기 시작했다.
첫 골목 꺽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끼이이이이익.............'
차 바퀴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태운 차는 앞바퀴를 중심으로하여 시계방향으로 뒷바퀴가 쫘악 밀리며 커브를 틀었다.
이제 저 사거리..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꺽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있는 그녀의 집이 보이게 된다.
난 떨리는 두 손을 깍지를 끼며, 나도 싸움에 동참해서 조금이나마 그를 도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는 어둠이 깔린 도로를 가르며, 앞으로 빠른 속도로 질주해 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꺽이는 지점에 도착하면서 몸이 급격히 왼쪽으로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