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시 모음> 허영자의 '완행열차' 외 + 완행열차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허영자·시인, 1938-) + 기차 기차가 갑니다. 이쪽과 저쪽을 지퍼로 잠그며 치익-폭, 치익-폭 기차가 갑니다. (박방희·시인, 1946-) + 기차를 타요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길을 가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허수경·시인, 1964-) + 기차 타고 싶은 날 이제는 낡아 빛바랜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반짝거리는 레일이 햇빛과 만나고 빵처럼 데워진 돌들 밟는 단벌의 구두 위로 마음을 내맡긴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떠나는 친구 하나 배웅하고 싶은 내 마음의 간이역 한번쯤 이별을 몸짓할 사람 없어도 내 시선은 습관에 목이 묶여 뒤돌아본다. 객실 맨 뒤칸에 몸을 놓은 젊은 여인 하나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머무르지 못해 안타까운 세월이 문득 꺼낸 손수건 따라 흔들리고 있다. (김재진·시인, 1955-) + 레일을 벗어난 기차를 타고 레일을 벗어난 기차를 타고 와글거리는 지구의 도심을 빠져나가자. 승무원이 조는 사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와 악수를 하고 거울이 없는 도시를 지날 때면 가방을 열어 립스틱과 파운데이션 스킨 로션까지 버려야지 그대가 있는 도시에 들어서면 굽 높은 구두는 아이들 장난감으로 주어야겠다. 기차가 원점으로 돌아갈 즈음 나는 그대의 손을 잡으리. (노여심·시인, 1962-) + 밤기차 나는 눈먼 밤기차 허허벌판을 홀로 달리는 고독과 고해(告解)의 터널을 수십 번 지나서야 새벽빛 타고 승천할 수 있습니다. (김진성·시인, 1962-) + 기차는 서 가는 사람 앉아 가는 사람 누워 가는 사람 이렇게 기차는 달린다 승차에서 하차까지 이렇게 사람은 달린다 거의 이렇게 달린다 완행으로도 달린다 완행만큼의 불편과 저속으로도 <안락과 고속은 동일> 이렇게 기차는 달리고 싶다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기차 덜크덩 덜크덩 기차 하나 달려간다 겨울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간이역 지붕 위로 해는 기울고 스무 살, 광기의 한때도 저물고 무너진 가슴으로 검은 희망 하나 달려온다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덜크덩 (백창우·가수 시인, 1960-) + 밤기차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면서 기차는 쓴약 같은 기적소리로 울고 있었다 유리창에 눈발이 잠깐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눈송이와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껴안고 나뒹굴며 싸우는 폭설이었다 잠들지 않은 것은 나와 기차뿐 철기 옆 낮은 처마 아래 불빛 하나뿐 저기 잠 못 든 이가 처녀라면 기적소리가 멀어지면 더욱 쓸쓸해서 밤새도록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안도현·시인, 1961-) + 기차와 나 그 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이제 여기 잠시 멈추어 서서 가쁜 숨결 고르며 지나온 길 한번 돌아보고 싶구나. 간이역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서서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급행열차에게 길 비켜주고 곁눈질도 좀 하고 눈 들어 구만리장천도 쳐다봐야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리움의 이 길을 그 동안 나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제 그림자에 쫓기듯 헐떡이며 살아왔구나. 이제는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 돌아보고 싶구나. 여명에서 여명으로 이어지는 푸르른 역과 역들을 지나면 있을 아득한 종착역 바라보며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신발끈 다시 조이고. (변준석·시인, 1962-) + 아름다운 열차 우리는 지금 달리는 열차 속에 앉아 있는 거다. 망망한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 닿기 위하여 검붉은 장미가 뒤덮은 공동묘지를 지나고 있는 거다. 차 안은 휘황한 불빛, 더러는 열띤 토론을 하고, 더러는 곤한 잠에 떨어지고, 또 더러는 달콤한 사랑에 취해서. 아니, 우리는 지금 어느 산역에 버려져 있는 거다. 요기를 위해 내려 잠시 한눈파는 사이 열차가 떠나 노숙자들이 우글거리는 대합실 한구석에서 좀체 오지 않는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더러는 불안과 초조로 잠을 설치고, 또 더러는 술과 도박으로 어둠을 잊으면서. 아니,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기에도 지쳐 마침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열차를 만들 꿈을 키우고 있는 거다. 스스로들 열차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태우고 바닷가 도시를 지나 더 멀리 달려갈, 아예 하늘로 날아올라 전갈자리 페가수스자리까지 갈 힘차고 아름다운 열차를 만들 꿈을 키우고 있는 거다. (신경림·시인, 193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