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八福)
윤동주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참고 마태복음 5장 4절)
원래 성경책에 보면..
NIV :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공동번역 :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개역한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경에는 손쉽게 아이러니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팔복 역시 아이러니로 이루어져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니...
그런데 윤동주는 이 아이러니 구조에 한 번의 아이러니를 다시 더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슬플 것이란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에 대한 윤동주의 처절함을 느꼈다. 선하게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이 악한 세상에서 슬프지 않을 수 없는데.. 아마도 그들은 영원히 슬프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리라.
그런데 문득 얼마 전 이 시를 생각하다 문득 이 시의 이면을 떠올렸다.
여러 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사실 이 시는 딱 두 행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앞의 구절에서 보면 슬퍼하는 자 = 복이 있는자이고, 뒤의 구절인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저희가 영원히 복받을 것이요 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음과 동일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복 받을 것이요."
중요한 것은 여기의 복이 세속적인 의미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엔 자꾸 이시가 내 가슴속을 맴도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