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색색가지 예쁜 손으로
내 마음을
만지작거리는 때문입니다.
(전봉건·시인, 1928-1988)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서정홍·농부 시인, 1958-)
+ 꽃과 나
예쁘다고
예쁘다고
내가 꽃들에게
말을 하는 동안
꽃들은 더 예뻐지고
고맙다고
고맙다고
꽃들이 나에게
인사하는 동안
나는 더 착해지고
꽃물이 든 마음으로
환히 웃어보는
우리는
고운 친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함박눈
유난히 눈이 많던 어느 해 겨울밤
눈길을 밟아 다녀간 도둑 있었다
흰 쌀을 흘리며 달아난 발자국이
광에서 사립문 밖으로 선명했다
뒤따라가려는 아버지 말리신 건
욕심 많다 소문났던 할머니셨다
고맙게도 밤새도록 함박눈 내려
그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었다
(강인호·시인)
+ 마중물과 마중불
외갓집 낡은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야 물이 나온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땅 속 깊은 곳
물을 이끌어 올려주는 거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마중불이 있어야 한다.
한 개비 성냥불이 마중불이 되어
나무 속 단단히 쟁여져 있는
불을 지피는 거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끌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마중불이 되고 싶다.
(하청호·시인, 1943-)
+ 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아, 글쎄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야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이동순·시인, 1950-)
+ 따뜻한 얼음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안에 숨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박남준·시인,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