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성찰하는 시 모음> 이생진의 '곤충의 종교' 외 + 곤충의 종교 곤충 그들은 산에 절을 세우지 않는다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다 일요일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책을 끼고 다니는 일도 없다 모두 공부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산에 오면 그런 것을 배운다 (이생진·시인, 1929-) + 앙증맞은 종교 복숭아 솜털이 목덜미에 송송 박힌 아이가 놀고 있다. 내 영혼의 갈피 갈피에 솜털이 와서 박힌다. 뒤통수가 아름다운 종교 하나 키우는 동안 니체의 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김나영·시인, 1961-) + 당신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복효근·시인, 1962-) + 나의 종교 나의 종교는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당신을 만나 사랑의 진실을 알아가고 있고 당신을 통해 살아 있음의 기쁨에 눈뜨고 당신이 있어 날마다 새 힘을 얻고 당신과 더불어 삶의 희망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스물 다섯 해 기나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품어준 착한 당신 너무 고마운 당신. 나의 종교는 사랑 바로 당신입니다. (정연복·시인, 1957) + 나의 종교는 당신입니다 나의 종교는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의 부지런한 손에서 경전을 읽고 나는 당신의 따뜻한 가슴에서도 경전을 읽습니다 나의 종교는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의 맑은 눈빛에서 사랑을 배우고 당신이 주시는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나의 종교는 당신입니다 나는 날마다 당신께 나아가 당신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곧 당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윤동재·시인, 1958-) + 나의 종교 나무들이 걸어다닐 수 있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미련 없이 나는 이 세상을 떠나리 그들마저 어떤 목적으로 이리저리 몰리거나 따스한 집 속에 머물기를 택한다면 더 이상 세상 살맛이 있으랴 길 위에 서서 길을 돌아보며 우린 하찮은 존재를 깨달아가나니 이 땅에 붙박혀 선 채로 초록의 법문을 외우는 이들이여 그대 고매한 수도승들이 흔들린다면 그 어떤 종교가 소용 있으랴 양양 왕벚나무 화사한 설렘으로 정선 구절리 소나무 산비알 서늘한 독경소리로 양평 용문산 은행나무 아름답고 거룩한 잎 떨구는 모습으로 비자나무 숲, 동백나무 숲, 전나무 숲의 속 깊은 풍성함으로 나는 이 세상에 아직 살아남아 있음을 고마워하네. (장승진·시인, 1974-) + 내 일상의 종교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한없이 추하게 만든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살아오면서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전설적인,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이재무·시인, 1958-) + 신에 대한 생각 모든 이에게 있어 신에 대한 생각은 서로 같지 아니합니다. 아무도 타인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레바논계 미국인 시인, 1833-193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