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시 모음> 정연복의 '서울막걸리' 외 + 서울막걸리 홀로 마시는 막걸리도 내게는 과분한 행복이지만 벗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더욱 황홀한 기쁨이다 나를 내 동무 삼아 집에서 혼자 따라 마시는 서울막걸리는 왠지 쓸쓸한 우윳빛 하지만 벗과 눈빛 맞대고 서로의 잔에 수북히 부어주는 서울막걸리는 색깔부터 확 다르다 벗과 다정히 주고받는 투박한 술잔에 담긴 서울막걸리의 색깔은 남루한 분위기의 희뿌연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왜 그리도 눈부신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뽀얀 살결 같다 + 소주 나를 빼닮아 잠잠히 투명한 영혼의 그대여 삶이 즐겁고 기쁠 때 마음이 힘들고 외로움에 겨울 때면 얼마든지 나를 들이켜도 좋으리 언제든지 그대 가까이 그대의 호명(呼名) 기다리고 있나니 그대 천 원 짜리 낡은 지폐로 나를 찾아와서 동그랗게 이 몸 안아 주면 나 그대의 좋은 벗 되어주리 애오라지 하나 간절한 소원 있다면 내가 행여 그대의 몸에 몹쓸 독이 되지 않는 것 그대의 귀한 생명을 응원하는 맑고 순수한 기운이 되는 것 그래서 그대와 나의 생명의 빛깔이 서로 닮아가는 것 + 술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 인생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눈물 같은 소주를 마시며 잠시 슬픔과 벗할지언정 긴 한숨은 토하지 않기로 하자 아롱아롱 꽃잎 지고서도 참 의연한 모습의 저 나무들의 잎새들처럼 푸른빛 마음으로 살기로 하자 세월은 훠이훠이 잘도 흘러 저 잎새들도 머잖아 낙엽인 것을 + 가벼운 슬픔 이틀이나 사흘 걸러 늦은 밤 막걸리를 마십니다 뽕짝 테이프를 들으며 쉬엄쉬엄 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 술병에 담긴 750밀리리터 서울 막걸리 한 병이 동날 무렵이면 약간 취기가 돌며 스르르 삶의 긴장이 풀립니다 가슴 짓누르던 근심과 불안의 그늘이 옅어집니다 달랑 천 원이면 해결되는 내 생의 슬픔입니다. 이렇듯 나의 슬픔은 참 가볍습니다. + 도봉산에서 어둠이 사르르 커튼처럼 내리는 도봉산 자운봉 오르는 비스듬한 길 중턱 이제는 정이 든 바위들 틈에 앉아 막걸리 한 잔의 행복한 성찬을 차렸다 저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집마다 귀가(歸家)의 불빛은 점점이 포근한데 저기 우람한 산봉우리는 말이 없네 + 땅콩 세상 욕심과 거리가 먼 그 친구도 정 붙일 욕심 하나 필요했을까 호프집에 들어가면 500cc 생맥주 몇 잔에 허름한 안주 하나 시키는 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건만 어쩌다 술자리 무르익어 호프 한 잔씩이라도 더하는 날엔 뿌듯하게 놓여 있던 안주도 어느새 우리의 인생살이 마냥 가난한 바닥을 드러내는데 때마침, 아롱아롱 주기(酒氣) 너머 벗의 당당하고 또렷한 외침 "여기, 땅콩 좀 더 갖다 주세요." 참 신기하게도 친구의 욕심은 늘 채워진다 불경기에 장사하기 힘들 텐데 싫다는 내색 없이 수북히 땅콩 한 줌 선물처럼 얹어놓고 가는 술집 주인의 넉넉한 손길 그래서 오늘도 벗들과의 행복한 술자리 + 아차산 손두부 방금 쪄낸 아차산 할아버지 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손두부 한 모에 걸쭉한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벗과 마주앉아 도란도란 대화의 꽃 피우는 날은 고단한 인생살이 온갖 시름이야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행복한 축제일 허름한 옷차림의 서민들과 하산 길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의 구수한 대화를 귀동냥하며 술맛은 점점 좋아지는데 자꾸만 더 먹으라며 내 앞의 종지그릇에 두부 한 점 살며시 담아 주는 벗의 다정한 마음에 누추한 할아버지 집은 어느새 지상 천국이 되네 + 오라, 인간의 집으로 여기는 인생 열차의 간이역 같은 곳 아차산 산행길의 가빴던 숨 잠시 고르며 한 구비 쉬었다 가는 고향 마을 사랑방 같은 곳 선한 눈빛의 할아버지가 사십 여 년 정성으로 빚어 오신 군침 도는 손두부 한 모 앞에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어렴풋한 첫사랑 연인의 뽀얀 살결 같은 우윳빛 서울막걸리 한 잔 주거니받거니 하며 기분 좋게 달아오르는 취기(醉氣)에 세상 살맛 새록새록 움트는 곳 한세월 살면서 켜켜이 쌓인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의 짐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순수한 동심으로 되돌아가 낡은 천 원 짜리 지폐 몇 장뿐인 지갑이 얇은 사람도 이곳에 들어서면 어느새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가 되는 곳 오라, 세상의 벗들이여 사시사철 아무 때나 들러도 소박한 인정(人情)이 넘실대는 따뜻한 인간의 집 아차산 할아버지 손두부집으로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