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관한 시 모음> 정연복의 '꽃의 찬가' 외 + 꽃의 찬가 꽃은 본래의 자기가 아닌 그 무엇이 되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름이 없고 작은 들꽃이라도 대대손손 저만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를 지켜간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다. 이 세상의 수많은 꽃들 중에 자살하는 꽃은 하나도 없다 사는 게 힘들다고 투정하지 않고 묵묵히 세월 견디며 비바람 눈보라 속에도 끝내 꽃을 피우고야 만다 꽃이 약하지 않은 이유다. 꽃은 외딴 곳에 홀로 필 줄도 알고 무더기로 어울려 필 줄도 안다 외로움을 겉으로 티내지 않고 한데 모여 요란을 떨지도 않으며 한세월 제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꽃이 통이 크고 믿음직한 이유다. 꽃은 매양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지만 수정 같은 눈물 하나 제 몸에 가만히 담아두었다가 따스한 햇살 한줄기에 그 눈물 가벼이 씻을 줄도 안다 꽃이 인생의 스승인 이유다. 꽃은 한평생 말 한마디 뻥끗하지 않지만 피고 지고 또 다시 피는 삶으로 참 뜻깊은 무언(無言)의 말을 한다 꽃이 최고의 시인인 이유다. + 꽃과 사랑 꽃이 피는가 했는데 어느새 지고 있다 피고 지는 일 한바탕의 꿈이다. 사람의 목숨도 꽃처럼 피고 지는 것 너도, 나도 언젠가 가고 없겠지. 어쩌면 세월은 이리도 바람같이 흘러갔을까 너와 나의 머리에 흰 서리 폴폴 내리네. 이제 얼마쯤 남았을 지상에서의 우리 생의 시간 알뜰히 사랑으로 물들여 가자. + 사랑 꽃 사랑하면 마음속에 꽃이 핀다 사랑이 찾아오면 연분홍 진달래 사랑이 즐거우면 노랑 개나리 사랑이 향기로우면 보랏빛 라일락 사랑이 순수하면 하얀 목련 사랑이 소박하면 노란색 민들레 사랑이 불붙으면 빨간 장미 사랑이 깊어지면 안개꽃 핀다. 세상의 꽃들이 모두 지더라도 사랑 꽃은 시들지 않는다 사랑은 오래오래 가는 꽃이다. + 목련의 말씀 피고 지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요 눈부시게 피었다고 기쁨으로 들뜨지 말아요 덧없이 진다고 슬픈 눈물 보이지 말아요. 한 번 피면 또 한 번은 지는 것 자연의 엄숙한 순리요 목숨의 당연한 이치인 것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무릇 생명은 왔다가 가는 것을. 세월의 강물 따라 나도 흐르고 너도 흘러 만남 뒤에 이별 이별 뒤에 새로운 만남이리니 피고 지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 허망하다 말하지 말아요 그게 목숨의 일인 것을. + 장미의 생 장미가 붉게 타고 있다 온몸 시뻘건 불덩이 시원한 바람도 그 불을 끌 수 없다. 질 때는 지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 티끌도 남김없이 활활 태우는 한철 뜨거운 생이다. 질 때를 지레 두려워 않고 당당히 거침없이 완전 연소로 향하는 저 불꽃의 생을 훔쳐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난다 많이 부끄럽다. + 코스모스 국화과에 속한 한해살이풀 꽃말은 순정(純情) 그러니까 너는 단 한 해를 살면서도 순수한 감정의 꽃 하나로 피고 지는 거지 단순하면서도 깊은 한 생(生) 살다 가는 거지. 씽씽 불어오는 바람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아픔도 괴로움도 안으로 고이 감추고 길고 가느다란 몸 살랑살랑 춤추는 티없이 밝은 성격의 명랑한 아가씨. 신(神)의 맨 처음 습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더 정답게 느껴지는 동구(洞口) 밖 사랑의 파수꾼. + 풍경 세상에 꽃들 많고 많아도 꽃이 제각기 하나의 풍경이듯 이 세상 사람들 셀 수 없이 많아도 사람은 저마다 하나의 풍경이다. 그 깊이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온갖 사연 간직한 채 꽃같이 피고 지는 풍경이다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너도, 나도 한 점 풍경이다. + 꽃과 나 구름같이 바람같이 잘도 흐르는 세월 따라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덩치 큰 꽃을 보면 예전처럼 감흥이 일지 않는다 유명하고 눈부신 꽃을 보아도 마음에 별로 감동이 없다. 하지만 애기똥풀이나 제비꽃처럼 순박하고 작은 꽃 민들레나 채송화같이 땅에 바싹 붙어 있는 꽃 더욱이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면 걸음이 슬그머니 멈추어진다 숨죽이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한순간 가슴 찡하다. 드넓은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나' 또한 그런 꽃같이 작디작고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 꽃과 사람 꽃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내가 더 잘났다 으스대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해진 자기 자리를 죽는 날까지 가만히 지킬 뿐 다른 꽃을 질투하지도 험담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꽃은 따스한 햇살 포근한 달빛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 비바람 찬이슬도 같이 맞고 함께 운다. 꽃의 세상과 사람의 세상은 너무 다르다 꽃의 이념은 평등과 조화와 평화 사람의 이념은 차별과 불화와 다툼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꽃에게서 배울 게 아주 많다. + 연꽃의 기도 시궁창 속에서도 연꽃은 핍니다 시궁창 속이라야 연꽃은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연꽃이 피어 시궁창 냄새는 사라집니다. 주님! 시궁창 같은 세상이라고 등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런 세상에 제가 살아 세상이 조금은 맑아지게 해주십시오. 오, 주님! 한 잎 꽃잎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제 삶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는 길 하나 가르쳐 주십시오. * 정연복(鄭然福) : 1957년 서울 출생. |